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혁재의 사람사진

벼랑 끝에 선 여성 돕기 40여년/ 나자렛성가원 이인복 대표의 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권혁재의 사람사진 / 이인복 나자렛성가회 대표

권혁재의 사람사진 / 이인복 나자렛성가회 대표

이인복 나자렛성가원 대표를 만난 게
2015년 크리스마스 즈음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손에 내 눈이 머물렀다.
부드러운 말씨와 달리 유난히 대비되는 투박한 손,
그는 테이블 아래서
두 손을 번갈아가며 내내 주무르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야 그 손에 얽힌 의미를 듣게 되었다.
“제 별명이 일벌레입니다.
노는 시간 없이 일만 하고 살았죠.
방학 때조차 국내외 강연을 하며
강연료로 시설 운영비를 댔어요.
아마 지구 몇 바퀴를 돌았을 겁니다.
손가락 관절이 펴지지 않을 만큼
글을 쓰고 책을 번역했어요.
30권 가까이 냈는데
인세 수입도 전액 법인에 들어갔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테이블 아래서 번갈아가며 두 손을 주물렀다. 이는 손가락 관절이 펴지지 않을 만큼 글을 쓰고 책을 번역한 탓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테이블 아래서 번갈아가며 두 손을 주물렀다. 이는 손가락 관절이 펴지지 않을 만큼 글을 쓰고 책을 번역한 탓이었다.

여기서 법인이란 나자렛성가원이다.
이곳은 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피해 여성을
보호하는 쉼터다.
나락으로 떨어진 여성들을 돌보고, 자활을 돕는다.

이 대표는 예서 40년 넘도록 여성들의 벗이요,
어머니로 살아온 게다.
그는 6·25전쟁 당시 말 그대로
열세 살 ‘성냥팔이 소녀’였다.
1950년 12월 23일,
이 소녀 앞에 흑인 병사와 유엔군 차림 한국 청년이 섰다.
이 둘은 “내일 아침에 압록강 전투에 투입된다.
우리의 생명을 유산으로 주고 갈 사람을
뽑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께서 너를 선택한 것 같다”며
전투식량·담요·외투 등이 담긴
유엔군 배낭 네 개를 주고 갔다.

그러면서 “성당을 찾아가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을 남겼다.

이 소녀가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일 때
그의 어머니가 유언도 남겼다.
“부평에 성매매 피해 여성이 많아서
우리가 성폭행을 안 당했다.
그들을 돌보며 살 거라”는 당부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 이인복 대표가 늘 품고 사는 말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 이인복 대표가 늘 품고 사는 말이다.

이름 ‘마리아’와 이 유언이
지금껏 당신 아닌 남을 위해 살아온
마중물이 된 게다.

인터뷰 후 그에게 손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부끄럽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간곡히 부탁해서야 내민 그의 두 손에
살아온 삶이 온전히 배어 있었다.

최근 이인복 대표는『우리들 인생의 ‘깔딱고개’ 이야기』,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등 모두 여덟권의 책을 발간했다. 게 중 『우리들 인생의 ‘깔딱고개’ 이야기』는 6·25전쟁에서 겪은 죽음의 참상과 가족의 이별, 행복하게 지내던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10대 소녀 시절, 하례객 없이 소박하게 치른 혼인, 전 재산을 헌납하며 세운 나자렛성가회 법인의 우여곡절, 연로한 몸에서 오는 고통 등을 담은 인생고백록이다.

최근 이인복 대표는『우리들 인생의 ‘깔딱고개’ 이야기』,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등 모두 여덟권의 책을 발간했다. 게 중 『우리들 인생의 ‘깔딱고개’ 이야기』는 6·25전쟁에서 겪은 죽음의 참상과 가족의 이별, 행복하게 지내던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10대 소녀 시절, 하례객 없이 소박하게 치른 혼인, 전 재산을 헌납하며 세운 나자렛성가회 법인의 우여곡절, 연로한 몸에서 오는 고통 등을 담은 인생고백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