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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대응도 불사…푸틴, 우크라이나 집착하는 진짜 이유 [똑똑, 뉴스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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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독자 박선미님의 질의를 받아 담당 기자가 심층 취재해 작성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연말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뉴스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연말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뉴스1]

“우리는 이미 물러설 곳이 없다.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대응은 다양할 수 있다. 우리 군사전문가들이 내게 하는 제안들에 달려있다.”(26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는 과거 러시아의 땅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여겨왔다.”(23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고,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까지 돌연 중단한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이 거칠어지고 있다. 현 ‘우크라이나 사태’의 원인을 서방으로 돌리며, 우크라이나 내 분쟁 지역들이 ‘원래는 러시아의 땅’이라고까지 강조한다. 그 배경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다. 30년 전 구소련 붕괴와 함께 독립한 우크라이나에 푸틴 대통령이 집착하듯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토가 우리를 5번이나 속였다.”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16일(현지시간) 정상 회담이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의 '빌라 라 그랑주'에 도착해 악수하고 있다. [AP=뉴시스]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16일(현지시간) 정상 회담이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의 '빌라 라 그랑주'에 도착해 악수하고 있다. [AP=뉴시스]

23일(현지시간) 연례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서구 사회가 1990년대 우리에게 동유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토는 뻔뻔하게 5번이나 우리를 속였다”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게 왜 협박이 되는가”라고 강변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와 관련한 불만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는 2007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약속은 지난 1990년 9월 동‧서독 통일 협정, 이른바 ‘2+4’ 협정이다. 당시 동독 내 소련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 동유럽으로의 나토 확장 금지를 약속받았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장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가 심각한 경제난을 겪는 동안 동유럽은 빠르게 서구화됐다. 그 사이 나토는 1999년 폴란드‧체코‧헝가리를 끌어들였고, 2004년에는 러시아와 국토를 맞대고 있는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비롯해 루마니아‧불가리아‧슬로바키아까지 대거 가입시켰다.

러시아의 입장에선 이미 동진 약속을 저버린 ‘믿지 못할 서방’이 마지막 완충 지대인 우크라이나까지 넘보고 있는 셈이다. 그가 “캐나다 혹은 멕시코에 러시아가 로켓을 가져다 놓는다면 미국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라며 반문하는 이유다. 이번 사태도 지난 9월 우크라이나가 자국에서 나토와 연합 군사훈련을 벌인 이후 러시아가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었다”고 반발하며 본격화됐다.

러시아-유럽 잇는 가스관 루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러시아-유럽 잇는 가스관 루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 동슬라브 국가들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의미다. 로이터 통신은 “고대 러시아의 수도가 키예프였던 데서 알 수 있듯,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를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다. 러시아가 지난 2014년 강제합병한 크림반도도 1954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러시아 땅이었던 것을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에 이양한 역사가 있다.

푸틴의 무기, ‘600% 넘게 오른 천연가스 가격’

지난해 12월 29일(현지시간)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냐스비주 인근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의 가스 압축소에서 한 근로자가 파이프를 점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9일(현지시간)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냐스비주 인근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의 가스 압축소에서 한 근로자가 파이프를 점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의 최근 강경 행보에는 치밀한 전략적 계산도 깔려있다. 올해 이미 600% 이상 오른 천연가스 값이 그의 무기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군사 행동 가능성’을 언급한 지난 21일 러시아 가스의 유럽 수출을 위한 주요 수송로 중 하나인 야말~유럽 가스관이 잠기며 겨울철을 맞은 유럽에는 비상이 걸렸다. 유럽에서 사용되는 천연가스의 약 40%는 러시아가 공급하는 만큼 야말-유럽 가스관 공급 중단은 당일 유럽의 가스 가격을 22.7% 폭등시킬 만큼 시장에 큰 영향을 줬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이 되는 네덜란드 TTF거래소의 천연가스 내년 1월 인도분 선물가격은 이날 메가와트시(㎿h)당 180유로(약 24만원)를 돌파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7년 8월 15일, 근육질 상체를 드러낸 채 투바공화국 사냥터에서 휴가를 즐기는 푸틴 대통령. [AFP=연합뉴스]

2007년 8월 15일, 근육질 상체를 드러낸 채 투바공화국 사냥터에서 휴가를 즐기는 푸틴 대통령. [AFP=연합뉴스]

올해 서유럽이 바람과 일조량까지 부족해지며 신재생 에너지 생산이 급감한 지금이 러시아로선 유럽에 대한 영향력 넓히기에 최적기다.

이는 특히 16년 간 재임한 앙겔라 메르켈 행정부 이후 신임 총리가 집권을 시작한 독일에 영향을 주고 있다. 2022년까지 완전한 탈핵을 준비하는 독일은 천연가스 가격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는 독일에 지난 9월 완공된 우크라이나를 지나지 않는 새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의 최종 사용 승인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 가스관을 전면 가동할 경우 독일의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이 2배가 될 예정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기존 송유관이 지나는 우크라이나는 매년 수십억 달러의 수수료를 잃을 것으로 추정된다.

푸틴(오른쪽)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5월 29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흑해 연안에서 함께 요트를 타고 있다. [AP=연합뉴스]

푸틴(오른쪽)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5월 29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흑해 연안에서 함께 요트를 타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는 최근 벨라루스의 ‘하이브리드 전쟁’(전통적 무력행사가 아닌 기술·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역량을 동원하는 전쟁) 배후에 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벨라루스는 폴란드 국경으로 중동 난민을 밀어 내면서 유럽 전체에 부담을 주는 외교적 카드로 악용하고 있다.

'강한 러시아의 향수'가 곧 푸틴의 기반

2000년 집권을 시작한 푸틴 대통령은 총리 재임(2008~2012)을 포함해 21년간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아직까지 2024년 대선 출마 여부를 밝힌 적은 없지만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정치적 인기를 유지해야 한다.

푸틴 대통령(앞쪽)이 나치 독일 침공 76주년인 22일(현지시간) 크렘린궁옆 무명용사의 묘에서 폭우를 맞으며 헌화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앞쪽)이 나치 독일 침공 76주년인 22일(현지시간) 크렘린궁옆 무명용사의 묘에서 폭우를 맞으며 헌화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일 발표된 러시아 레바다 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11월 내 푸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찬성하는 러시아 국민은 63%로 나타났다. 지난 10월 67%에서 다소 떨어지긴 했어도 러시아 국민의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다. 이 같은 지지율 배경엔 구소련 시절 파워에 대한 향수가 있다. 지난 3월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7%는 소련의 붕괴를 “애석하다”고 말했다.

지난 2005년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자, 가장 바꾸고 싶은 사건”이라고 꼽았던 푸틴 대통령은 12일 러시아 제헌절을 맞아 국영방송 ‘로시야1’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소련 붕괴 이후 때론 달빛을 보며 택시를 몰았다. 솔직히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불행히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며 ‘강한 러시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앞서 크림반도 강제합병이 있었던 2014년 푸틴의 지지율은 88%로 최고치를 찍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1990년대 초 택시 운전을 한 적이 있다고 깜짝 고백한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10년 하바롭스크에서 라다 승용차 운전을 위해 안전벨트를 채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던 1990년대 초 택시 운전을 한 적이 있다고 깜짝 고백한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10년 하바롭스크에서 라다 승용차 운전을 위해 안전벨트를 채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다만 푸틴 대통령이 당장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등 분쟁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나서진 않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17일 우크라이나 사태의 긴장 완화를 위한 러시아-미국 조약 초안을 공개했는데, 여기엔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금지 외에도 동유럽, 캅카스, 중앙아시아에서 나토군은 어떤 군사 활동도 하지 말라는 다소 무리한 요구가 담겼다. 서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 침공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다. 반면 이같이 무리한 요구를 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는 만큼 지리한 긴장만 계속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우선 현 사태를 체스 게임에서 무승부로 끌고 가는 ‘스테일 메이트’(stalemate) 상태로 만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스테일 메이트는 체스에서 양측 모두 수가 막혀 승자가 가려지지 않아 무승부로 끝내는 경기를 말한다. 실제로 푸틴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인데 현재 긴장 국면이 손해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가 적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방법”(로이터)이라는 해설이 나오는 이유다.

2018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75주년을 기념해 볼고그라드의 기념관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 [AFP=연합뉴스]

2018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75주년을 기념해 볼고그라드의 기념관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 [AFP=연합뉴스]

문제는 체스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양측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결말을 피할 수 없단 점이다. 푸틴이 체스 말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은 언제든 다시 화약고로 떠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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