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20대 대선, 태종 이방원에게 묻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사상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사상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경쾌한 퓨전 드라마나 짜릿한 장르 드라마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오랜만에 방영되는 정통사극이 주는 묵직함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시대인 조선 건국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이 드라마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되면서 더욱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때마침 대한민국의 제20대 대선을 향한 과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 이 드라마를 대하는 시청자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높은 기대를 받는 한편, 현실의 유력 대선 후보들은 선거가 진행될수록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대한민국이 처한 난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리더십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누가 더 흠집이 많은 나쁜 사람이고 어느 쪽이 더 무능한 정부가 될 것인가를 다투고 있을 뿐이다.

새 대통령, 태종 때만큼 험난할 것
진영 대립과 양극화로 갈등 고조
하나의 몸으로 두 얼굴의 정치해야
균형잡힌 결단 내리는 리더십 필요

얼마 전 나는 태종 이방원의 정치 생애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발표해온 학술논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태종처럼 승부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주변 지인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의 승부와 연관시켜 여러 질문을 해왔다. 태종이라면 이번 대선에서 어떤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승부할 것인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책략이 필요한가? 후보 중에 누가 태종의 리더십에 부합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혁명이나 정변과 같은 비상수단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국민의 표심을 얻어 권력을 장악할지에 대해 태종은 어떤 답변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년 3월 9일 권력의 향배가 정해진 이후에 대해서라면, 태종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승자에게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 만한 충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등을 죽인 후 부왕 이성계를 퇴위시키고 정종을 옹립한 이방원은, 1400년 2차 왕자의 난을 처리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권력을 장악한 태종 앞에 펼쳐진 정치공간은 녹록지 않았다. 정변은 유교적 국가 정체성으로부터 일탈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종은 유교 개념을 동원하여 정변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유교적 군주임을 자임하면서 자신이 파괴한 유교적 군신관계를 회복하고, 유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한편 태종의 의도와 별개로, 정변 행위는 권력이 누구의 전유물도 아닌 강자가 쟁취, 장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결과, 태종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을만한 자를 미리 찾아내어 처단하는 냉혹한 권력 정치를 펼치게 된다. 요컨대 권력 장악 이후 태종은, 한편으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회복·유지에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초래한 권력 쟁탈전을 관리·극복해야만 하는 이중구조에 처하게 되었다. 맹자가 권하는 도덕 정치와 한비자가 제시하는 권력 정치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관리하고 극복하기 위해 태종은 두 얼굴의 소유자가 되었다. 한편에서 바라보면 유교적 군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편에서 바라보면 한비자적 군주의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와 같은 정치를 구사한 태종은, 1410년에 이르러 마침내 진정한 승부처를 맞이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게 된다.

내년 3월 9일 이후 신임 대통령 앞에 펼쳐질 정치공간은 태종이 맞이한 그것 못지않게 험난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미·중 간에 신냉전 시대가 전개되면서 양자 간에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최악의 국면에 빠진 한일관계와 북한의 핵문제로 인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며, 국내에선 정치적 진영대립과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러한 난제를 풀어갈 리더십에 있다.

진영대립의 구도 속에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그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정 운영에 파행을 거듭한 모습에 많은 국민이 실망했다. 이번 대선은 2017년보다도 더욱 심한 진영대립 속에서 치러진다. 그만큼 승자는 승리 이후 자기 진영의 논리에 더 매몰될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기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앞서, 국민 전체를 통합하여 민주공화국의 국가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리더는 하나의 몸으로 두 얼굴의 정치를 연출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자기 진영에 친화적인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가 마주하게 될 국정의 중요 사안들은 어느 한쪽의 얼굴만으로는 결코 일관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선 후보 중에 누구를 선택하겠냐고 태종에게 묻는다면, 상충하는 진영의 논리와 국가의 논리 사이에서 무거운 긴장감을 이겨내며 균형 잡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라고 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