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글로벌 아이

‘드라이브 마이 카’가 전하는 말

중앙일보

입력 2021.12.2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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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크리스마스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다. 요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하마구치 류스케(濱口竜介)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집 『여자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에선 올 여름 개봉했다가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 국제영화상 예비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재상영이 시작됐다. 코로나19가 안정돼 어디를 가든 북적이는 연말의 도쿄, 영화관도 만석이었다. 179분짜리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앞서 걷던 관객이 옆 친구에게 속삭인다. “근데 한국이 왜 저렇게 많이 나오냐? 좀 이상하더라.”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겐 스포일러일 수 있다. 주인공은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 아내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분노와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삶,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広島)연극제에 안톤 체호프의 작품 ‘바냐 아저씨’의 연출자로 참가하게 되고, 그곳에서 운전사 미사키(미우라 토코)와 만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장면. [사진 트리플픽쳐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한 장면. [사진 트리플픽쳐스]

과거에 붙잡힌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기본 얼개는 소설과 같다. 하지만 영화에는 원작엔 없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연습 장면이 길게 등장한다. 이 연극엔 일본과 한국·대만·필리핀 등 여러 국적의 배우들이 참여해 각자의 언어로 연기를 한다. 히로시마에 터를 잡은 한국인 부부의 이야기도 비중있게 나온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은 한국의 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미사키의 모습이다. 영화를 본 일본인의 의문(불만?)은 여기서 나왔을 게다. 이건 일본 영환데, 왜 보기싫은 한국인들이 잔뜩 나오는 거야.

그 느낌이 뭔지는 알 것 같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 예술인들이 함께 무대에 서고, 영화를 찍고 교류하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양국 국민들이 서로를 점점 더 미워하고, 코로나19까지 닥치면서 예술 분야에서도 무언가를 함께 도모하는 게 불편해진 상황. 나 역시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연극 같은 걸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감독의 답은 아마도 희망적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배우들이 만나 처음 하는 일은 각자의 언어로 대본을 되풀이해 읽고 또 읽으며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이해의 순간이 찾아오고,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단절된 개인들이 제 몫의 암울함 속에 허우적대는 듯한 이 계절, 더없는 위로를 건네는 영화를 만났다. 한·일 관계의 미래까지 생각이 뻗어나간 건 분명 직업병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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