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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50년 만의 55분짜리 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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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첫 음은 오후 8시, 마지막 음은 55분쯤 후에 울렸다. 단편영화 한 편보다 조금 긴, 오직 한 곡이었다.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 연주된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이다.

독특한 곡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출판업자 안톤 디아벨리가 1819년 영리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냈다. 탁월한 작곡가 50명을 모아 작품 하나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모든 작곡가에게 똑같이 32마디짜리 악보를 나눠줬다. 형식은 왈츠, 작곡자는 본인. 슈베르트·리스트 등이 같은 악보를 가지고 변주를 하나씩 붙였다.

당연히 베토벤도 의뢰를 받았다. 그리 친화적 성격이 아니었던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상업성 넘치는 음악을 받아들고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구두 뒤축.” 쉽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디아벨리의 왈츠가 쓸데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베토벤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변주 33개를 붙여 길고 복잡한 작품을 써버렸다. 다른 이들이 이미 변주를 하나씩 제출한 뒤인 1823년이었다. 디아벨리는 베토벤의 작품을 제1권, 나머지 작곡가의 작품을 제2권으로 출판하며 ‘지각 납품’을 반갑게 받아줬다.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신수정. [사진 모차르트홀]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신수정. [사진 모차르트홀]

“연주 가능성과 악기 기능은 고려하지 않는다”던 베토벤이 작심하고 4년 동안 쓴 작품이다. 피아니스트의 모든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다.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장식음이 도처에 있고, 화음은 지나치게 복잡하며, 크고 작은 음량의 대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무엇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를 거의 한 시간 동안 여러 방법으로 차별화해 표현해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잘못하면 연주자도 청중도 지치기만 하고 끝난다. 피아니스트 윤미재는 한 논문에서 “피아니스트를 고려했다고 보기 힘든 작품이다. 피아니스트에게 고통”이라 썼다.

16일 연주자는 1942년생인 신수정 피아니스트였다. 내년 여든인 그의 앞에 ‘디아벨리’의 불친절한 길이와 기교가 놓였다. “오늘 연주가 너무 걱정이 됐다”며 청중에게 하소연하며 시작한 연주는 베토벤의 우주 하나를 거뜬하게 그려냈다. 피상적 주제와 숭고한 변주를 대비시키고, 헨델·모차르트 같은 선배 작곡가들을 인용하며 서양 음악의 역사를 한 곡에 넣은 베토벤의 정신이 선명히 살아났다.

신수정 피아니스트는 1971년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디아벨리 변주곡’을 한국 초연했다. 유학을 했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복에 고무신을 갖추고 연주하면서 배웠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음악학자 한스 폰 빌로의 말을 빌려 이 곡을 ‘베토벤의 소우주’라 소개했다. 어려운 작품을 소화하려면 젊은 기량이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람의 모든 정신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한 피아니스트가 50년 동안 들여다본 55분의 우주가 그걸 말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