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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휴일 싫다, 그러나 이번 크리스마스 만큼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7)

잔잔한 캐럴을 들으며 텅 빈 거리를 걸었다. 양쪽으로 늘어선 트리는 화려한 배경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비록 관객은 하나도 없지만.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코로나19라는 먼저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예년만큼 반갑진 못하지만.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혀 오래된 명화를 즐기는 게 고작이다. 밤늦은 거리엔 인적이 없다. 덕분에 캐럴 가득 반짝이는 거리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응급실에서 시달리느라 인제야 퇴근한 보람이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강화된 거리 두기가 그것이다. 누군가 오미크론이 성탄절 선물이라고 헛소리를 했다던데,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코로나19 폭발로 응급실이 미어터질까 봐 노심초사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라도 거리두기를 강화한다니 그저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크리스마스라지만 코로나19라는 먼저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예년만큼 반갑진 못하다.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혀 오래된 명화를 즐기는 게 고작이다. [사진 pxhere]

크리스마스라지만 코로나19라는 먼저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예년만큼 반갑진 못하다.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혀 오래된 명화를 즐기는 게 고작이다. [사진 pxhere]

9시면 사람들은 술 마실 곳이 없을 것이다. 고작 해봐야 모텔이나 찾을 테고. 그래. 괜찮다. 모텔은 괜찮다. 그 정도는 응급실에서 충분히 감내할만하다. 거기서 일어나는 사고는 발기 지속증이나 은밀한 부위의 골절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아침엔 얼굴 벌게진 커플이 원하는 사후피임약 처방쯤일 테고. 어려울 게 전혀 없다. 코로나 환자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더구나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 또한 반가운 소식이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다쳐서 응급실에 실려 오고도 끝까지 센 척하는, 그런 인간들을 어르고 달래서 치료받게 하는 거에 비하면 모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년 이날 응급실에서 겪던 시달림이 올해는 없을 테니, 그 또한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코로나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밤늦게까지 즐기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2년 내내 코로나에 시달린 응급실에게, 고생하는 의료진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올 크리스마스는 주말이다. 또 하나의 축복이다. 쉬는 날은 이렇게 겹쳐야 제맛이다. 크리스마스는 대체 공휴일도 아니다. 그러니 하나의 온전한 행복이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된 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은, 남들 쉬는 날이다. 세상엔 뭔 놈의 쉬는 날이 그리도 많은지. 주5일 근무네, 공휴일이네. 최근에는 누구의 발상인지 대체 공휴일까지 생겨 내 심기를 건드린다. 세상 모두가 쉬는 즐거운 날, 응급실만 굴러가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자꾸 나를 비뚤어지게 만든다. 더구나 휴일은 평일보다 일도 더 힘들다. 주변 병원이 모두 쉬니, 갈 곳 없는 환자들이 전부 응급실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남들이 쉬는 날은 우리에게 고통일 따름이다. 그래서 응급실은 휴일이 밉다.

게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휴일에 일하기 싫었으면 응급의학을 하질 말던가?” 이렇게 코웃음 치는 이들을 보면 나는 묻고 싶다. “세상과 자기 직업에 불만이 하나도 없으신가요? 싫은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지셨나 봐요? 아버지가 대기업 오너이신가보죠? 부럽습니다.”

예전에는 응급실 구석에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럴 정신도 없다. 코로나 19가 모든 걸 빼앗아 갔다. [사진 Luis Melendez on Unsplash]

예전에는 응급실 구석에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럴 정신도 없다. 코로나 19가 모든 걸 빼앗아 갔다. [사진 Luis Melendez on Unsplash]

아무튼 작년부턴 대체 공휴일이 잔뜩 생기는 바람에 그만큼 일이 많아졌다. 아무런 보상도 없다. 남들 모두 행복한데 나 혼자 뚱 해있는 거, 그거 얼마나 짜증 나는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남들에겐 휴일을 선물했으면 소외된 우리에겐 피자라도 한판씩 쏴주든가! 정 없는 사람들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휴무일과 주말이 겹치면 너무 즐겁다. 소소한 기쁨이다. 어찌 그리 마음을 못되게 쓰냐고? 쉬는 날 피 말리며 응급실에서 일하는 고통. 그거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 그러니 심통을 부릴 수밖에!

예전엔 응급실 구석에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럴 정신도 없다. 코로나 19가 모든 걸 빼앗아 갔다. 응급실이 언제는 한가했겠느냐마는, 그래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억지로라도 여유를 즐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다. 하루하루가 너무 큰 고통이다. 심적인 여유가 없다. 겨울이 더 싫다. 산타 할아버지도 나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만 계시면 좋겠다. 괜히 빙판길에 골절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 아파도 치료해줄 여력이 없다. 요즘 응급실 사정이 그렇다. 많은 환자가 구천을 떠돌고 있다. 코로나 때문이다. 환자들의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다들 선물 받기는 애초에 글렀다. 이럴 땐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쉬는 거다. 지금 아프면 누군가의 생일이 당신의 기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집에서 쉬세요.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저도 얼른 들어갈게요.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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