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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여시해?" 이말에 입닫는다…현실엔 '욕설전쟁'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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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대부분의 Z세대는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위해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 언스플래쉬

대부분의 Z세대는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위해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 언스플래쉬

“너 페미야? 여시(여성시대)해?”
고등학생 박지혜(18)씨는 수업 중 친구의 어머니를 조롱하는 남학생에게 ‘네 말은 이래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가 ‘꼴페미(남성 혐오 사상을 가진 페미니스트)’ 낙인이 찍혔다. 그는 “여학생은 무슨 말만 하면 ‘페미’라는 소리를 들으니, 당연한 얘기조차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몇 년 전만해도 인터넷 상의 소수 의견에 불과했던 젠더 갈등이 현실 세계를 흔들고 있다. 남성 우월주의가 강한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급진적 여성주의 성향의 ‘워마드’ 등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가 상대에 대한 혐오성 발언을 쏟아내더니, 이제는 대선을 앞두고 정치계의 주요 화두가 됐다. 지난 4월 재보궐 선거와 6월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이대남(20대 남성)’을 결집한 게 계기가 됐다.

이후 혐오의 골은 더 깊어져 여자양궁 대표팀 안산 선수의 짧은 머리 논란에서부터 편의점 GS25의 ‘집게손가락’ 오해, 남성이 결혼하면 여성에게 이용만 당한다는 ‘설거지론’과 ‘퐁퐁남’이라는 원색적인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페미니즘 토론 나만 손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페미니즘은 원래 양성의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사이에서 페미니스트는 남성혐오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누군가 단어의 오용을 지적하면, ‘페미라서 편든다’는 비난을 듣고 감정이 상하기 십상이다.

이들은 평범한 사회생활을 위해 젠더 갈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잘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 전모(26)씨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질까 봐 페미니즘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라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이상한 애’라는 평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현실에선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극렬한 남녀 대결은 없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또래집단에서 ‘꼴페미’ 또는 ‘한남’이란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페미니즘 자체가 금기어가 된 셈이다.

대학생 오모(24·여)씨는 “애인이나 남사친(남성 친구)과 한 번도 젠더 문제로 갈등을 일으킨 적이 없다”며 “아무래도 잘못하면 싸울 수 있으니 그런 주제는 일부러 피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유모(26·남)씨는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이 두려워 친한 남자끼리도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는 꺼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말 잘못 하면 절교당하고, 집단서 매장  

최근 한국의 ‘젠더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최근 한국의 ‘젠더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Z세대가 입을 다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성차별 경험을 고백했을 때 이해받기는커녕, 없는 일 취급하며 부정당하거나, 네가 오해하거나 착각한 게 아니냐는 식의 반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생 박모(26·여)씨는 “5년 전 교회에서 독서 모임을 하다가 여자들이 살면서 겪은 차별에 대해 얘기하니 한 오빠가 다짜고짜 ‘아닌데요?’라며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박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서로 의견이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경험을 거짓말로 몰아버리는데 어떻게 대화하나”며 “그 이후 이성에게 젠더 문제는 터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는 자체 검열이 생겼다”고 말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 절교를 당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또래집단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다. 박씨는 “친한 남동생이 여성부가 일을 못하니 폐지하자는 게시물을 올렸기에 ‘국회가 일 못 하면 국회도 문 닫아야 하냐’고 댓글을 달았다가 SNS 계정을 모두 차단당했다”고 했다.

남녀 ‘경쟁’ 아닌 ‘공동체 의식’ 회복해야

한국 사회에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존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 사회에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존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결국 현실에서 막혀버린 소통과 표현의 수요는 온라인 게시판이나 유튜브 등으로 몰리게 됐다. 유모(26·남)씨는 “현실에서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을 조심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 욕 등 원색적인 표현이 난무한다”며 “현실과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이중적 자아를 갖게 된 것 같아 혼란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선 중요한 가치관에 대한 의견은 일단 얼버무려야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들이 많으니 페미니즘, 양성 평등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 서로 동상이몽할 수밖에 없고, 오해와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것”이라며 “토론을 통해 나의 의견을 침착하게 전달하고, 남의 생각에도 귀 기울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젠더 갈등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한편, 한국의 성 평등 수준이 진일보했다는 사실에는 공감했다. 지금의 극심한 논쟁이 양성평등 사회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서 앓는 열병으로 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은 적대적 경쟁을 멈추고, 다 함께 잘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전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은 “한국 사회가 포용적 복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존을 위해 모두가 협력하는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라며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경쟁적 사고와 적자생존의 방식을 지양하고, 다 같이 더불어 잘사는 게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가 여성에만 집중하는 정책을 넘어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구 교수는 “부처 이름부터 ‘성 평등부’로 바꾸고 예산도 늘려, 성 평등에 관심 있는 남녀 모두 채용해야 한다”며 “여성부 간부도 여성만 임명할 게 아니라 양성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면 여성부에 대한 비판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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