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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주는 곳 없다"…의대 최초 '성소수자 강의' 만든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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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에서 국내 의과대학 최초로 ‘성 소수자’에 대한 강의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겠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르면 내년, 늦어도 2년 안에 이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 시작은 지난 1학기에 처음 생긴 ‘성 소수자 건강권과 의료’라는 강의다. 강의를 개설한 윤현배(43) 휴먼시스템의학과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윤현배 서울대 의대 교수가 2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윤현배 서울대 의대 교수가 2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윤 교수는 “아내가 성 소수자 대표 병원 중 한 곳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성 소수자에 대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내과 전문의인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돌아보니 가르쳐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고 강의를 개설한 계기를 설명했다.

“지금 안 하면 20년 뒤도 같다”

서울대 의대 97학번인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의대 또는 수련 병원에서 성 소수자에 대해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지금이라도 교육을 하지 않으면 20년 후에도 달라질 게 없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강의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해외 사례를 위해 논문과 가이드라인을 찾아보고, 국내에서 성 소수자를 진료하고 있는 전문의들을 수소문해 조언을 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성 소수자에 관심이 많은 12명의 전문의가 모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라는 작은 연구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많은 도움과 노력으로 의학과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탄생했다. 성소수자의 기본적인 개념, 역사적인 변천 과정, 건강권 침해 등을 배우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떠한 의료적 노력이 필요한가를 살펴보는 이론 강의였다. 이 과목을 수강한 박모씨(의학과 2학년)는 “생각보다 성소수자 친화적인 진료 환경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며 “아직도 성소수자는 자신을 진료해줄 병원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모든 존재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스티커 하나만 붙여도 분위기는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의학 배우고 싶다”…제자의 메일

서울대 의학과 4학년 학생들은 성소수자 친화 진료를 하거나 전문 의료진이 있는 살림의원, 강동성심병원, 순천향병원, 그리고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실습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장진영 기자

서울대 의학과 4학년 학생들은 성소수자 친화 진료를 하거나 전문 의료진이 있는 살림의원, 강동성심병원, 순천향병원, 그리고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실습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장진영 기자

1학기 이론 수업을 종강한 후, 윤 교수는 한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 과목도 열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메일을 보낸 전모씨(의학과 4학년)는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는 의학적 필요가 맞닿아 있는 사람들인데 정규 의학교육 과정에서는 그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며 “이를 배우고 싶어서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제자의 메일에 자극받아 급하게 여름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전씨를 포함해 4명이 모였다. 보통 실습은 서울대병원에서 하지만, 이번엔 성소수자 전담 의료진이나 클리닉이 있는 타 병원으로 파견을 가야 했다. 성소수자의 주 진료 과목인 산부인과, 성형외과, 정신의학과에서 외래 진료를 참관했다고 한다. 전씨는 “성소수자든 아니든 환자 개개인에 맞춰서 진료하는 ‘환자 중심적’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며 “성소수자도 진료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학적 지식과 태도 및 책임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연될수록 고통받는 사람은 는다”

윤현배 교수는 "서양에서는 교육 과정뿐만 아니라 의대 전체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기조가 있다”며 “성소수자는 내 밖에 환자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의사도, 교수도, 학생도 성소수자일 수 있고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구든 ‘포용(inclusiveness)’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윤현배 교수는 "서양에서는 교육 과정뿐만 아니라 의대 전체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기조가 있다”며 “성소수자는 내 밖에 환자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의사도, 교수도, 학생도 성소수자일 수 있고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구든 ‘포용(inclusiveness)’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미국 등 서구 선진국에서 교육하는 것처럼 최소한 성소수자의 개념 등 핵심 내용은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더 관심 있는 학생들은 선택 과목으로 심화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윤 교수의 목표다. “의사들이 무지해서 차별이나 실수를 할 수 있다”면서다.

윤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개강 전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날은 故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윤 교수는 “세상이 달라지는 건 시간 문제지만, 지연되면서 이렇게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 변 하사를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윤 교수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특성, 환경,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면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저는 제 분야인 의료에서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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