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에서 국내 의과대학 최초로 ‘성 소수자’에 대한 강의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겠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르면 내년, 늦어도 2년 안에 이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 시작은 지난 1학기에 처음 생긴 ‘성 소수자 건강권과 의료’라는 강의다. 강의를 개설한 윤현배(43) 휴먼시스템의학과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윤 교수는 “아내가 성 소수자 대표 병원 중 한 곳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성 소수자에 대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내과 전문의인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돌아보니 가르쳐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고 강의를 개설한 계기를 설명했다.
“지금 안 하면 20년 뒤도 같다”
서울대 의대 97학번인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의대 또는 수련 병원에서 성 소수자에 대해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지금이라도 교육을 하지 않으면 20년 후에도 달라질 게 없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강의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해외 사례를 위해 논문과 가이드라인을 찾아보고, 국내에서 성 소수자를 진료하고 있는 전문의들을 수소문해 조언을 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성 소수자에 관심이 많은 12명의 전문의가 모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라는 작은 연구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많은 도움과 노력으로 의학과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탄생했다. 성소수자의 기본적인 개념, 역사적인 변천 과정, 건강권 침해 등을 배우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떠한 의료적 노력이 필요한가를 살펴보는 이론 강의였다. 이 과목을 수강한 박모씨(의학과 2학년)는 “생각보다 성소수자 친화적인 진료 환경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며 “아직도 성소수자는 자신을 진료해줄 병원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모든 존재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스티커 하나만 붙여도 분위기는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의학 배우고 싶다”…제자의 메일
1학기 이론 수업을 종강한 후, 윤 교수는 한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 과목도 열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메일을 보낸 전모씨(의학과 4학년)는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는 의학적 필요가 맞닿아 있는 사람들인데 정규 의학교육 과정에서는 그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며 “이를 배우고 싶어서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제자의 메일에 자극받아 급하게 여름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전씨를 포함해 4명이 모였다. 보통 실습은 서울대병원에서 하지만, 이번엔 성소수자 전담 의료진이나 클리닉이 있는 타 병원으로 파견을 가야 했다. 성소수자의 주 진료 과목인 산부인과, 성형외과, 정신의학과에서 외래 진료를 참관했다고 한다. 전씨는 “성소수자든 아니든 환자 개개인에 맞춰서 진료하는 ‘환자 중심적’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며 “성소수자도 진료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학적 지식과 태도 및 책임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연될수록 고통받는 사람은 는다”
미국 등 서구 선진국에서 교육하는 것처럼 최소한 성소수자의 개념 등 핵심 내용은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더 관심 있는 학생들은 선택 과목으로 심화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윤 교수의 목표다. “의사들이 무지해서 차별이나 실수를 할 수 있다”면서다.
윤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개강 전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날은 故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윤 교수는 “세상이 달라지는 건 시간 문제지만, 지연되면서 이렇게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 변 하사를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윤 교수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특성, 환경,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면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저는 제 분야인 의료에서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