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 세계여행 - 일본 이자카야 ‘이모가라’
연말은 연말인가 보다. 오래된 인연을 떠올린다.
2016년 6월 늦은 저녁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시. 후미진 골목에서 낡은 이자카야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모가라(いもがら)’. 지역 사투리로 ‘미야자키 사내들’이란 뜻이라고 했다. 우리 말로 하면 ‘경상도 머슴아’ 정도 될까. 허름한 분위기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네 평 남짓한 작은 가게였다. ‘ㄱ’ 자로 꺾인 바 테이블에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 둘이 떨어져 앉아 맥주를 홀짝였고, 바 안쪽 주방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모든 메뉴가 300∼500엔이었다. 비싸야 5000원 정도라는 뜻. 사케 한 잔을 시켰더니, 유리 컵을 받친 접시로 사케가 넘쳐 흘렀다.
두 중년 남자는 오랜 단골 같았다. 주방 할아버지와 스스럼없이 말을 섞었다. 대화가 끊기면 혼자 술잔을 비웠고, 주방 구석에 놓인 작은 TV를 올려다봤다. 늙은 남자들이 TV를 보다 이따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시간이 흐르자 한 남자는 꾸벅꾸벅 졸았고, 다른 남자는 테이블 위 통성냥을 켜 담뱃불을 붙였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꼬부랑 할머니가 안쪽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방 할아버지의 어머니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원래는 어머니가 가게를 했었는데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져 4년 전부터 주방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들도 30년 이상 된 단골이라고 했다. 거의 매일 퇴근길에 들러 밥도 먹고 술도 마시다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튿날 저녁, 지난 밤의 푸근했던 기억에 끌려 다시 가게를 찾았다. 전날과 달라진 건 없었다. 늙은 어머니와 덜 늙은 아들이 있었고, 꾸벅꾸벅 졸던 아저씨도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는 60년 넘게 가게를 했는데, 내 일행이 최초의 한국인 손님이라고 말했다. 전날과 같이 사케와 두부 부침을 시켰다. 밤 11시가 다 됐다.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용기를 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 기자입니다. 이 가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부탁합니다. 은퇴하신 건 알지만, 할머니가 간단한 요리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평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할머니가 주섬주섬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의 익숙한 몸짓으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앞에 시금치나물과 가지무침을 담은 접시 두 개가 놓였다. 할머니가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먹어봐요. 내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자꾸 눈물이 떨어졌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음식 앞에서 한참 울었다.
어릴 적 어머니의 반찬을 내놓은 할머니의 이름은 후쿠하라 타에코(福原妙子)다. 늙은 어머니 곁을 지키는 아들의 이름은 후쿠하라 마사토시(福原政利)고. 2016년 늙은 어머니는 여든여덟 살이었고, 늙은 아들은 예순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다시 꼭 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지키지 못했다. 죄송하다. 부디 잘 계시길, 부디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오래 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