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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人들]나의 발걸음은 당신의 두 눈... 안내견 나감이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멍멍! 제 이름은 나감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외모를 가진 래브라도 리트리버죠. 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그건 바로 빛을 잃은 분들의 눈이 되어주는 거예요. 꽉 채운 두 살이 된 지난 봄날 우리 아빠를 만났어요. 서로 발걸음을 맞춰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망막박리로 중도실명한 최상민씨. 장애인단체에서 인권 옹호와 장애 인식 개선 일을 하고 있어 매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한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을 나감이와 동행하고 있다. 둘은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24시간 내내 떨어지지 않는다. 장진영 기자

망막박리로 중도실명한 최상민씨. 장애인단체에서 인권 옹호와 장애 인식 개선 일을 하고 있어 매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한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을 나감이와 동행하고 있다. 둘은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24시간 내내 떨어지지 않는다. 장진영 기자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을 돕기 위해 훈련된 장애인보조견으로 엄선된 종견과 모견으로부터 태어난다.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내견의 90% 이상은 기질, 품성, 친화력 등이 검증된 리트리버 종이다. 생후 7주가 된 강아지들은 사회화 훈련을 위해 일반 가정에 위탁돼 1년간 ‘퍼피워킹(Puppy Walking)’ 과정을 거친다. 교육시설로 돌아온 예비 안내견들은 6~8개월간 도로, 상가, 교통수단 등 실제 생활 공간에서 훈련을 받는다. 이후 파트너(시각장애인)와의 매칭 과정을 거쳐 함께 삶을 살아간다.

생후 7주차 퍼피 워킹 시작전. 왼쪽 세번째가 나감이다. 사진 삼성화재안내견학교

생후 7주차 퍼피 워킹 시작전. 왼쪽 세번째가 나감이다. 사진 삼성화재안내견학교

7년 전 망막박리로 인해 중도 실명한 최상민(41)씨는 지난 3월 안내견 나감이와 만났다. 최씨는 중도장애인으로서의 삶이 나감이를 만나기 전과 후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흰 지팡이를 잡고 다닐 때는 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과 싸우는 기분이었어요” 유도 블록은 중간중간 끊어져 있기 일수였고 도로의 연석과 입간판에 항상 부딪혔다. 정강이의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지팡이 시절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외출을 했고 한가로운 산책은 꿈도 못 꾸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최씨와 나감이. 장진영 기자

사무실을 나서는 최씨와 나감이. 장진영 기자

나감이와의 만남에는 4주의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처음 2주는 파트너인 최씨가 안내견학교로 입소해 배변, 산책 등 기본적인 생활교육을 받는다. 이후 2주간은 훈련사가 동행해 실제 생활공간에서 교육이 진행된다.

오후 5시. 나감이의 식사시간이다. 밥그릇을 '순삭'하는 나감이의 소리를 들으며 최씨가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오후 5시. 나감이의 식사시간이다. 밥그릇을 '순삭'하는 나감이의 소리를 들으며 최씨가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그는 나감이를 만나고 나서 세상이 더 넓어졌다고 했다. 최씨는 장애인단체에서 권익 옹호와 인식 개선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매일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동작구 상도동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하는데, 나감이 덕분에 안전하게 다니고 있다. 보행의 주도권은 파트너인 최씨에게 있다. “많은 사람이 안내견이 내비게이터라고 오해하는데 가야 하는 길을 제 머릿속에 그려놓고 안내견에게 ‘가자’하며 알려줍니다” 안내견의 역할은 눈앞의 장애물을 피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혼자 걸을 수 있어야만 안내견과 만날 수 있다. 안내견과 매칭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의 독립보행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가 말했다.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정하고 출발하죠. 우리는 함께 걷는 거예요”

최씨와 나감이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최씨와 나감이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최씨는 나감이를 만나기전의 삶이 장애물 투성이였다면 만남 이후 세상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최씨는 나감이를 만나기전의 삶이 장애물 투성이였다면 만남 이후 세상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간혹 겪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지난 10월 장애인 이동지원 택시인 서울 바우처 택시를 예약했는데 안내견 동행 여부를 사전에 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탑승을 거절당했다. 개를 케이지에 넣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씨의 항의에 “개가 큰가요?”라고 묻는 상담센터의 반응이 더 황당했다.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일하고 있기에 업체에 항의했지만 아직까지 직접적인 사과는 받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시민은 “개 사룟값 하라”며 지폐를 쥐여주기도 했다.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감이는 조용히 최씨의 곁을 지켰다. 장진영 기자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감이는 조용히 최씨의 곁을 지켰다. 장진영 기자

지하철로 퇴근중인 최씨와 나감이. 장진영 기자

지하철로 퇴근중인 최씨와 나감이. 장진영 기자

마음 상하는 일도 많았지만, 곳곳에서 안내견에 대한 인식전환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입장을 거절했던 식당인데 잘 설명하니 많은 부분을 배려해주었어요. 이후 방문부터는 나감이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자리로 안내해 줍니다” 업무차 방문하는 관공서, 자주 찾는 편의점이나 카페 등도 불편 없이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하철로 퇴근중인 최씨와 나감이. 나감이는 최씨의 방향 지시 명령에 기민하게 유도했고 승강장과 열차 안에서도 익숙하게 자리잡았다. 장진영 기자

지하철로 퇴근중인 최씨와 나감이. 나감이는 최씨의 방향 지시 명령에 기민하게 유도했고 승강장과 열차 안에서도 익숙하게 자리잡았다. 장진영 기자

최씨는 안내견을 만나면 쓰다듬거나 음식을 주는 행위 대신 "눈으로만 예뻐해달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최씨는 안내견을 만나면 쓰다듬거나 음식을 주는 행위 대신 "눈으로만 예뻐해달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도로 보행과 지하철로 이어지는 최씨의 퇴근길에 동행했다. 오후 6시가 되자 나감이는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둘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카메라를 든 기자는 거의 뛰다시피 그들을 따랐다. “나감이 왼쪽 찾아, 계단 찾아” 조용하고 부드러운 명령에 나감이는 민첩하게 그를 안내했다. 승강장에서는 침착하게 앉아서 기다렸고 열차 문이 열리자 승객들이 다 내린 다음에 장애인석으로 이동해 얌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최씨는 안내견에 대한 관심은 고맙지만, 이것만은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몰래 사진을 찍거나 쓰다듬고 심지어 간식까지 주는 분들도 있어요. 눈으로만 예뻐해 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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