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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안겪은 청년표 효과…'3000켤레 구두'의 아들 지지율 1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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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1989년 사망)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가운데)와 부인 루이스(왼쪽), 누나 아이미(오른쪽)가 2018년 4월 필리핀 수도 마닐라 파드레파우라 대법원에 도착한 모습.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92)와 사이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1989년 사망)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가운데)와 부인 루이스(왼쪽), 누나 아이미(오른쪽)가 2018년 4월 필리핀 수도 마닐라 파드레파우라 대법원에 도착한 모습.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92)와 사이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1965~86년 재임)은 필리핀의 최장수 독재자로 꼽히곤 한다. 그런 그의 일가가 36년 만에 필리핀의 대통령 관저 말라카냥궁에 화려한 복귀를 할 채비를 하고 있다. 내년 5월 대선을 앞두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ㆍ이하 봉봉)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면서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2일(현지시간) 필리핀의 여론조사 기관 펄스아시아서베이를 인용해 설문 응답자의 53%가 내년 대선에서 필리핀 연방당 소속인 봉봉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같은 조사에서 봉봉의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현 필리핀 부통령은 20%로 2위에 올랐다. 1·2위의 차이가 20%p 넘게 난다. 뒤를 이어 이스코 모레노 마닐라 시장과 복싱 챔피언 출신 매니 파퀴아오는 각각 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부통령 선호도 조사에선 봉봉의 러닝 메이트인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이 45%의 지지율로 1위에 올랐다. 사라 시장은 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이다. 역대 대통령의 자녀들이 선거 초반부 두각을 나타내면서, ‘마르코스-두테르테’ 가문은 세대를 넘는 장기 집권의 꿈에 한발짝 가까워지게 됐다.

1960~80년대 필리핀의 권력을 틀어 쥐었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반체제 인사 탄압 등 무자비한 정책으로 80년대 중반 필리핀에서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을 촉발했다. 그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92)는 각종 구두ㆍ보석 등 사치품을 축적해 ‘3000켤레 구두의 여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정도였다.

마르코스의 ‘독재 유산’을 그 아들 봉봉이 극복한 비결에 대해 텔레그래프는 “정교한 소셜 미디어 캠페인으로 주요 타깃층인 젊은 세대를 공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르코스의 아들은 어떻게 유력 대선 후보가 됐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아랫줄 가운데)가 이달 8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케손시티에서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차량 행렬 도중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NS를 적극 활용하는 그는 젊은층에게 인기가 많다. [EPA=연합뉴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아랫줄 가운데)가 이달 8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케손시티에서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차량 행렬 도중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NS를 적극 활용하는 그는 젊은층에게 인기가 많다. [EPA=연합뉴스]

미국의 정치 전문매체 더 디플로맷은 지난 달 30일 분석기사를 통해 “이번 필리핀 대선에서는 소셜네트워크미디어(SNS)의 선전이 또 한번 판세를 좌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봉봉과 그의 캠프가 SNS를 통해 아버지 마르코스의 집권 시기를 “필리핀의 황금기”라는 이미지로 덧씌우고 있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디플로맷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주류 언론에 대한 이용도는 낮은 반면 “SNS 정보를 신뢰한다”는 이들은 87%로 높은 편이다. 올해 기준 필리핀 인구의 81%가 페이스북을 쓰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인구의 85%는 유튜브를 시청한다고 한다.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매체는 전했다.

다수가 SNS를 통해 선거 정보를 얻다보니, 검증보다 각 캠프의 물량 공세에 따른 선전이 더 잘 먹힐 수 밖에 없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는 대선에서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머니 이멜다 마르코스(92)의 생애를 그린 영상도 올라와 있다. [유튜브 캡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는 대선에서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머니 이멜다 마르코스(92)의 생애를 그린 영상도 올라와 있다. [유튜브 캡처]

SNS 선전으로 선거에서 먼저 효과를 본 건 지난 2016년 대선의 두테르테 대통령이었다. 두테르테 캠프는 자신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퍼뜨리는 일을 전담하는 팀을 별도로 고용했다. 디플로맷은 “지난 대선이 필리핀의 첫번째 ‘SNS 선거’였다면, 2022년 대선은 더욱 극적인 2막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년 대선 후보인 봉봉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436만, 유튜브 176만, 인스타그램에선 50만명에 달한다. 전체 등록 유권자(약 6100만명)의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는 페이스북에는 매일 서너 건의 선거 관련 홍보물이 꾸준히 올라온다. 유튜브를 활용한 브이로그는 물론 공유한 이들에게 경품을 주는 이벤트도 하고 있다.

그가 올린 콘텐츠에는 마르코스 일가를 비판하는 이들을 저격하고 반박하는 내용들이 포함됐다. 어머니이자 영부인 이멜다의 생애를 소상히 알리는 유튜브 콘텐트도 올라와 있었다.

“마르코스 시절 모르는 청년 유권자가 절반”

내년 대선 후보로 출마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왼쪽 두번째)가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오른쪽) 부통령 후보와 함께 이달 9일(현지시간) 필리핀 카비테주 바쿠르시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내년 대선 후보로 출마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왼쪽 두번째)가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오른쪽) 부통령 후보와 함께 이달 9일(현지시간) 필리핀 카비테주 바쿠르시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SNS에 영향을 많이 받는 젊은 세대가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 역시 봉봉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7월 기준 필리핀의 6046만 명의 등록 유권자 가운데 3141만명이 18~40세의 젊은층이었다. 전체 등록 유권자의 52%가 청년표인 셈이다.

텔레그래프는 “청년층은 86년 실각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절에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독재 정권을 직접 경험하지 못 했다”고 지적했다. 봉봉은 선거 기간 “아버지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싱가포르처럼 될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반면 아시아 지정학 전문가인 리처드 헤이대리언 필리핀 폴리텍대 교수는 “모든 객관적 지표에 따르면 마르코스의 독재는 필리핀에 재앙이었다”고 지적했다.

처벌 피한 ‘구두 3000켤레의 여인’ 이멜다

전직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92)가 지난 2018년 11월 필리핀 마닐라 남부 타귀그시에서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묘지를 방문했다.[EPA=연합뉴스]

전직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92)가 지난 2018년 11월 필리핀 마닐라 남부 타귀그시에서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묘지를 방문했다.[EPA=연합뉴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일가족의 공직 나눠먹기와 부정부패, 필리핀 경제 파탄 등으로 인권 단체와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72년부터 10년 간 계엄령을 선포해 반체제 인사와 비판적인 언론인을 무더기 투옥하고 고문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계엄령 기간 3257명이 사법적 절차나 근거 없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아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필리핀 경제도 서서히 무너졌다. 60년대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신흥 국가였다. 65년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본부가 한국ㆍ이란ㆍ일본 등을 제치고 마닐라에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코스 시기를 거치며 필리핀은 역대급 부채에 시달리며 파산 직전까지 갔고, 83년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피하기 위해 세계은행 등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

마르코스 시절 생긴 필리핀의 국가 빚은 2025년이 돼야 청산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가 남긴 긴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한 역대 정부에 회의를 느낀 필리핀 시민들이 외려 마르코스 시절의 향수에 빠져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들. [중앙포토]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들. [중앙포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86년 2월 정권을 연장을 시도하다가 시민들의 저항에 부닥쳐 권좌에서 내려왔다. 일가족은 하와이로 도피했다. 3년 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병사한 후 부인 이멜다와 자손들은 필리핀 땅으로 하나 둘 복귀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에 돌아온 봉봉은 상·하원의원을 역임했고, 이멜다도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마르코스 가문은 부패 혐의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사실상 피해왔다. 남편의 재임 기간 마닐라 시장·장관 등 공직을 맡았던 부인 이멜다는 2018년 스위스의 재단으로 자금을 불법 이전한 혐의 등 7건의 부패 혐의가 인정됐다. 지금까지 받은 유죄 선고만 징역 6년에서 최대 77년형이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고령 등을 이유로 3년 넘게 형 집행을 미루고 있다.

“독재자 일가 복귀 반대” VS “아들에게 죄 물어선 안돼”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선거관리위원회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위 참가자가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의 얼굴이 인쇄된 카드를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선거관리위원회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위 참가자가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의 얼굴이 인쇄된 카드를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대선 후보인 봉봉도 조세 포탈 혐의가 불거져 피선거권 자격 논란이 있다. 필리핀 선거법은 부정 부패 등과 관련한 범죄로 18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 받으면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여러 혐의 가운데 일부는 무죄, 일부는 유죄가 나온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은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봉봉의 캠프는 이 같은 움직임을 “시궁창 정치”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빅터 로드리게스 캠프 대변인은 FT에 “아버지에게 죄가 있더라도 자식에게 죄를 물려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필리핀인들에게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마르코스 시절 고문 생존자이자 일가의 귀환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보니파시오 일러건은 FT 인터뷰에서 “봉봉이나 그의 가족이 말라카냥의 궁전으로 돌아간다면 필리핀 역사는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정치는 소수의 엘리트가 대물림하는 것이 고착화돼 있다고 한다. 호주 국립대 연구에 따르면 2013년 필리핀 중간선거에서 당선된 하원의원의 74%가 특정 정치 가문 출신이었다. 공직으로 확대하면 ‘정치적 왕조’의 구성원은 90%에 육박한다고 텔레그래프는 지적했다. 그 가운데서도 마르코스 가문은 필리핀에서 가장 유력한 왕조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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