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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들, 쇼군에 와인 선물…대일 무역 윤활유 역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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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호 32면

와글와글

일본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인을 위한 상관이 설치됐던 나가사키 앞 데지마. [사진 나무위키]

일본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인을 위한 상관이 설치됐던 나가사키 앞 데지마. [사진 나무위키]

12월의 나가사키는 ‘작은 로마’라는 명성에 걸맞게 성탄절 분위기로 가득했다. 성가대의 합창 소리와 아이들에게 과자를 돌리는 서양 선교사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을 때는 주민 5만 명 대부분이 ‘기리시탄’(크리스천)이었고, 13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세운 성당도 있을 정도였다.

가톨릭의 폭발적인 성장에 놀란 막부 정권이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그 자리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온 것은 1641년, 하멜이 제주도에 오기 불과 12년 전이었다. 네덜란드는 원래 규슈지방의 히라도에 상관(商館)이 있었지만 막부의 명령으로 나가사키 앞 작은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옮겨 온다. 상관은 상주 무역사무소를 의미한다. 이때부터 19세기 후반까지 200여 년 동안 네덜란드는 일본의 유일한 대외교역 파트너가 된다. 종교행사를 엄격히 금지하고 오직 교역에만 집중한다는 조건이었다. 심지어 네덜란드인들끼리 성탄절 행사도 금지됐다.

18세기가 되면 상당히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하멜 시대에 동인도회사 직원들의 데지마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살이와 같았다. 『하멜표류기』가 탄생한 장소도 바로 그곳이었다.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다. 1년 이상 데지마 억류 기간 동안 그를 위로한 것은 와인 한잔이었다. 1636년 암스테르담 해군청의 지침에 따르면 대항해에 나서는 선원들에게 일주일에 1인당 0.5파운드의 치즈, 0.5 파운드 버터와 5파운드 빵을 지급하며 장교급에게는 두 배를 준다. 육류, 청어, 콩 등 여러 가지 음식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맥주는 겨울의 경우 35배럴, 그리고 여름에는 42배럴을 배에 선적하고, 와인은 프랑스산과 스페인산을 싣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스페인산이었다.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입항절차와 하역작업을 마치면 지역 책임자에게 간단한 선물을 주고는 했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고향이나 여행을 다녀오면 그 지역의 특산물을 선물로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를 ‘오미야게’(お土産)라 부른다. 교역 초기부터 네덜란드는 오미야게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은 군사장비와 항해기법 등 서구의 앞선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지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이국적 오미야게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남쪽에서 코끼리와 진귀한 새 등 거대한 동물도 가져왔지만, 작은 선물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그것이 바로 음식류, 먹고 마시는 것은 어느 문화에서나 중요한 소통의 도구이니까.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했던 것은 네덜란드의 버터와 치즈, 아몬드 그리고 와인이었다.

와인

와인

선물로서 와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자체 소비를 하고 간혹 상품으로 팔리기도 했지만 와인은 최고 권력자 쇼군 그리고 실력자들에게 바치는 선물로 주로 쓰였다. 동인도회사 책임자는 1년에 한 번씩 쇼군에게 인사하기 위해 에도를 방문하는 ‘에도참푸’(江戸参府, 네덜란드어로는 Hofreis)의 의무가 있었다. 이때도 와인은 필수 지참품이었다. 배에서 하역한 통에 들어있던 포도주에 독약이 들었는지 검사하는 엄중한 의식을 치른 뒤 다른 병과 그릇에 옮겨 봉해 쇼군에게 먼저 보내곤 하였다.

일본 고위 관료층에 와인의 위력은 대단했다. 특히 인기 있었던 것은 스페인의 말라가와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검붉은 색 레드 와인으로 이를 가리켜 영국인들은 ‘텐트 와인’이라 불렀다. 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에서 ‘붉다’는 뜻을 지닌 틴타(여성형), 혹은 틴토(남성형) 발음에서 유래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은 ‘Tint wijin’이라 적고 있었다. 1653년 8월 19일 하멜이 제주도에서 책임자에게 내놓은 것도 텐트 와인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기록에 스페인 와인이라고 적힌 것은 대부분 화이트 와인이었다고 일본의 음식 역사 전문가 조지 노자와 교수는 주장한다.

와인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종교와 사회생활에서 소통의 중요한 도구였던 것처럼, 낯선 이민족 사이에서도 훌륭한 가교역할을 해 주었고, 비즈니스의 윤활유가 되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해마다 양력 1월 1일이 되면 데지마의 동인도회사 상관에서는 네덜란드 신년 행사가 열렸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오란다 쇼가츠’(和蘭正月)라 불렀다. 화란의 새해맞이라는 뜻이다. 성탄절조차 즐기지 못한 아쉬움과 고국을 그리는 마음에 잠시 숨통을 돌리는 행사였다.

이때가 되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본인 통역, 나가사키의 주요 인사, 간혹 에도에서 파견된 사람들까지 초청해 네덜란드식 음식을 나눠 먹었는데 와인은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안주를 의미하는 사카나(肴)를 먹으며 와인을 나누는 것은 서양의 신식 문화를 의미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본인들은 눈치껏 음식을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끝날 때 자기 몫을 챙겨간 뒤 가족들과 나눠 먹곤 하였다고 한다. 와인과 서양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 난학(蘭學)의 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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