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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 오류보다 잘못된 대응이 더 큰 혼란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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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생명과학Ⅱ 오류 사태로 본 수능 문제점

지난 8일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오류와 관련해 집행정지 신청을 한 수험생들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 15일 법원은 문항 오류를 인정했다. [뉴시스]

지난 8일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오류와 관련해 집행정지 신청을 한 수험생들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 15일 법원은 문항 오류를 인정했다. [뉴시스]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오류 사태에 대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대응은 최악에 가깝다. 명백히 잘못된 출제인데 인정하지 않았고, 소송전까지 벌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반면 2010학년도 지구과학Ⅰ 19번 복수정답 인정은 모범 사례로 통한다. 수능 8일 만에 오류를 결정해 입시 혼란을 최소화했다. 당시 평가원장을 지낸 김성열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가 급박했던 그때의 뒷이야기를 처음 풀어놨다.

여섯 글자에서 시작된 문제제기

2009년 11월 12일 수능 다음날 평가원 게시판엔 일식 현상을 다룬 지구과학Ⅰ 문항 관련 이의신청 글이 올라왔다. 단 6글자로 ‘계산을 해보니’라고 쓰여 있었다. 실무자가 글쓴이에게 연락했고, 당사자는 현직 교사 K씨로 밝혀졌다. K씨는 “실제 계산을 해보면 결과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원은 그를 불러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2009년 오류땐 평가원이 먼저 시인
‘수학능력’ 대신 ‘정답찾기’로 변질
등급 나누려 문제 뒤틀어 오답 유도
본질 벗어난 수능체제 개편해야

이 문항은 2009년 7월 22일 실제 있던 일식 현상을 예시로 들었다. 지도상에 A·B·C 세 곳을 표시하고 각 지점에서 관찰되는 일식을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질문의 핵심은 A·B 중 어느 지점에서 일식이 더 길게 관측되느냐는 것이었다. 정답은 일식중심선에 위치한 A였다.

그러나 K씨는 B지점에서 일식이 더욱 길게 나타났다고 반박했다. 아마추어 천문학자인 그가 해당 날짜에 우연히 B지점에서 실측한 결과다. 문항에 경도와 위도가 표시되지 않아 정확히 따져볼 순 없지만 자신의 관측은 ‘실증’이라고 주장했다. 다음날 평가원은 한국천문연구원에 계산을 의뢰했고 K씨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김 교수의 이야기다.

출제 전 실제 관측 결과를 몰랐나.
“A·B 지점은 수험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상에 임의의 위치를 단순히 표시한 거다. 위도와 경도도 제시하지 않았다. 수업을 충실히 들었다면 어렵지 않게 정답을 골랐을 것이다. 문제 푸는 데 전혀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 자연현상에선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이날은 예외적으로 이론과 달리 B지점에서 일식이 길게 나타났다.”
출제진의 반응은.
“12일(목)에 수능을 치렀는데, 검토 결과를 갖고 20일(금)에 회의를 했다. 처음엔 정답을 구하는 데 이상 없으니 그냥 밀고 가자고 했다. 수험생들이나 언론도 이슈를 제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없던 일처럼 덮고 갈 순 없었다. 그래서 출제진에게 솔직히 말해 달라고 했다. ‘문항 오류의 책임은 출제진에게 없다, 모든 책임은 평가원이 진다’면서 말이다.”
오류를 인정했나.
“그렇다. 완벽해 보이는 이론도 반증이 나오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이유는 과학적 사고를 훈련시키기 위함이다. 수능의 목적은 고차원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것이지 정답 자판기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학생들은 출제자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걸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교육의 참 목적이 있다.”
복수정답 처리된 2009년 수능 지구과학Ⅰ 19번. 평가원이 먼저 오류를 시인했다. [중앙포토]

복수정답 처리된 2009년 수능 지구과학Ⅰ 19번. 평가원이 먼저 오류를 시인했다. [중앙포토]

평가원은 곧 브리핑을 해 문항 오류를 시인했다. 정답 확정 이전이어서 채점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입시 혼란도 적었다. 총 9차례의 수능 오류 중 가장 원만히 해결한 사건이었다. 김성열 교수는 “K씨의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우리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라며 “잘못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라고 했다.

출제 오류로 대학 탈락한 수험생도

그러나 올해 생명과학Ⅱ 사태는 문항 오류도 문제였지만, 평가원의 대응이 더 큰 잘못이었다. 수능 직후부터 수험생들 사이에서 오류라는 의견이 많았다. 주어진 설명을 바탕으로 3개의 명제 중 옳은 것을 찾아야 하는데, 설명 자체가 틀렸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입시업계에서도 99%의 강사들이 오류라고 주장했지만 평가원이 듣지 않았다”고 했다.

평가원은 지난달 29일 ‘해당 문항에 이상이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이 유지된다”고 반박했다. 전제가 잘못됐지만 답을 찾는 데 이상 없으니 오류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해명 과정에서 공신력도 잃었다. ‘이상 없음’ 결정 당시 자문한 전문가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해 깜깜이 자문 논란이 일었다. 지난 9일 법원의 정답 효력정지 결정 직전 평가원 측은 브리핑에서 “자문한 개인이나 학회가 공개될 경우 사이버 폭력, 비방 등 감내하기 어려운 여파가 생길 수 있어 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결국 수능 성적 공개 하루 전 정답 유예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렀다. 15일 법원의 빠른 판결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지만 혼란을 피할 순 없었다. 재판부는 “명백한 오류가 있고 이는 수험생들의 정답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적어도 심각한 장애를 줄 정도에 이른다”고 했다. 특히 “과학의 원리를 무시한 채 답을 고르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수험생들에겐 어떤 피해가 있었을까. 종로학원에 따르면 서울의 주요 대학 수시모집에 지원했던 A(18·서울 양천구)군은 지난 18일 탈락 통보를 받았다. 이번 오류 사태로 등급이 떨어져 최저등급 기준을 못 맞췄기 때문이다. 당초 논란의 20번 문항을 맞혀 2등급을 예상했지만 이 문항이 전원 정답 처리되면서 이 과목의 평균이 올랐고 A군은 3등급으로 밀려났다.

A군과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표준점수 만점이 69점→68점으로 하락해 1등급 컷은 65점→66점으로 올랐다. 1등급 인원은 309명→269명, 2등급은 587명→508명으로 줄었다. 주요 대학과 의대 등은 생명과학Ⅱ를 입시에 반영하기 때문에 뒤바뀐 성적이 당락에 영향을 미쳤다. 2009년처럼 채점 이전에 오류를 인정했다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수능 때마다 논란인 ‘킬러 문항’

생명과학Ⅱ 20번은 소위 ‘킬러 문항’이다. 유전학의 대가인 조너선 프리처드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다는 것이 놀랍고 인상적”이라고 했다. 2016년 JTBC 인터뷰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밝힌 일화도 유명하다. 자신이 쓴 소설 ‘삼포 가는 길’로 출제한 국어 문항을 풀었더니 40점밖에 못 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하나의 정답만 있겠느냐, 이런 교육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역대 수능 출제오류 사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역대 수능 출제오류 사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본래 평가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개개인의 학습 성과를 진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입시 등에서의 변별력이다. 수능은 변별력에만 치중하다 보니 교육 본연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일찌감치 수능 포기자가 나오고, 교실은 실패를 학습하는 곳으로 전락했다”(임성호 대표)는 지적이 나온다. 임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능, 무엇이 문제인가.
“수학능력을 측정한다는 본질에서 너무 멀어졌다. 등급 기준도 맞춰야 하고, EBS 50% 연계도 신경 써야 한다. 한 때는 만점자까지 1%에 맞추려 했다.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변별력만 신경 쓰다 보니 문항을 비틀고 꼬아 오답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게 ‘킬러 문항’이다.
“난이도에 따라 한두 문제로 1·2등급이 갈린다. 그걸 결정짓는 게 ‘킬러 문항’이다. 매년 어렵게 나와 교과 밖 출제 논란이 생긴다. 오답률 높은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출제위원도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정답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과연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을까.”

지난달 교육부는 새 교육과정 총론을 발표하면서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을 예고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입시제도 개편은 다음 정권으로 미뤘다. 지금 같은 입시제도 아래선 고교학점제의 파행이 불 보듯 뻔하다.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다양한 적성을 계발하겠다는 취지인데, 수능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입시과목의 쏠림 현상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현직 교사의 72.3%가 고교학점제 시행을 반대한다(8월 한국교총 교사 2206명 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고교학점제 시행을 못박은 건 대통령의 교육공약 1호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억지로 정책을 밀어붙일 게 아니라 수능의 역할부터 제 자리를 찾아놔야 한다. 이와 함께 입시제도 개편이 전제된 교육과정의 본질적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 공약’이라는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수능 오류 사태보다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