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의 손주입양 첫 허용…전통보다 아이 행복 우선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2.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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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부모가 손주를 자식으로 입양할 수 있다는 첫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입양 요건을 갖추고 입양이 아이의 복리에 더 부합할 경우’를 조건으로 달았지만, 이번 결정으로 조부모가 손주를 입양하는 새로운 형태의 입양이 가능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A씨 부부가 “외손주를 입양하겠다”며 낸 미성년자 입양 허가 청구소송 재항고심에서 입양을 불허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울산가정법원으로 이송했다. 대법원은 “미성년자의 친생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지 않아 조부모가 손자녀의 입양 허가를 청구하는 경우, 입양의 합의 등 입양 요건이 갖춰지고 입양이 자녀의 복리에 부합한다면 허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부모 손주 입양 허가 소송 대법원 판단

조부모 손주 입양 허가 소송 대법원 판단

대법원은 미성년자 입양에 대한 가정법원의 허가 요건을 규정한 민법 제867조와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에 따라 ‘입양될 자녀의 복리에 적합한지’를 최우선으로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민법은 존속(부모 및 부모 항렬의 친족)이 아닌 혈족의 입양은 금지하고 있지 않다”며 “조부모가 손자녀를 입양해 부모·자녀 관계를 맺는 것이 입양의 의미와 본질에 부합하지 않거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만 “조부모의 입양이 자녀에게 도움되는 부분과 우려되는 부분을 세심하게 따져 입양이 자녀의 복리에 적합한 것인지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씨 부부는 딸이 고등학생 때 낳은 손주를 생후 7개월 무렵부터 부양해 왔다. 딸이 출산 직후 남편과 이혼하면서 “못 키우겠다”며 부모 집에 아이를 두고 갔기 때문이다. 아이의 친권·양육자는 A씨 부부의 딸이지만 아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외조부모를 엄마·아빠로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A씨 부부는 손주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받을 것을 걱정해 법원에 일반 입양을 청구했다. 친생부모도 입양에 동의했다.

하지만 1·2심 재판부는 청구를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입양하게 되면 아이에게는 외조부모가 부모가 되고, 친생모는 어머니이자 누나가 되는 등 가족 내부 질서와 친족 관계에 중대한 혼란이 초래된다”며 “현 상태에서 A씨 부부가 아이를 양육하는 데 어떠한 제약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장애가 있더라도 미성년 후견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분 관계를 숨기기보다 정확히 알리는 것이 아이에게 이롭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2심 판단도 동일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원심 판단을 뒤집으면서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질서의 관점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 관계를 변경시키는 것이 혼란을 초래하거나 자녀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막연히 판단해 입양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 후견 제도의 존재를 이유로 입양을 불허할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다만 조재연·민유숙·이동원 대법관은 소수 의견에서 “조부모가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하고 친자녀인 것처럼 키우기 위해 입양하는 경우 양부모로서 양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입양의 의사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입양 사실을 숨기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양친자 관계가 형성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향후 자녀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조부모의 손주 입양을 조건부로 허가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힌 결정”이라며 “조부모 입양의 특수성을 고려해 입양 허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과 고려 요소도 상세히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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