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눈내리던 날…외식메뉴 투정하던 딸과 차 안 가요 떼창

중앙일보

입력 2021.12.23 15:00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64)

이제 중3 되는 딸 아이, 사춘기의 절정은 지났겠거니 했는데 가끔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곤 한다. 어쩌면 아이는 괜찮은데 받아들이는 내가 여유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넘어가면 될 것을 담지 못하고 뱉어 버린다. 그 날도 그랬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모처럼 학원과 시험, 숙제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었다. 바람도 쐬고 맛있는 점심도 먹자고 남편과 아이를 부추겼다. 특별한 계획이 없던 두 사람은 그저 내가 하자는 대로 차에 올랐다.

“동지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팥죽 먹으러 가자! 팥칼국수도 있데. 나쁜 기운도 훌훌 털어버리고 뜨겁게 한 그릇! 좋지 않아?”
“엄마, 나 팥 안 좋아하잖아.”
“다른 요리도 있을 거야. 들깨 칼국수 같은.”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한 시간을 달려 찾아갔던 식당에는 정말 팥 요리만 있었다. 오랜만에 집을 나서 맛있는 외식을 기대했던 딸 아이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팥죽과 곁들여 주문한 파전 몇 조각을 먹는 중 마는 둥 하더니 젓가락을 이내 내려놓았다. ‘맛있는데 조금만 먹어봐’, ‘나가서 다른 걸 먹자’, ‘엄마가 더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미안해’라며 아이를 달래보았지만 기분이 풀어지지는 않아 보였다. “왜 여기를 온 거야?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기대하고 나섰는데, 밥도 못 먹고 이게 뭐야. 그리고 난 늘 가고 싶은 곳이 있잖아. 거길 갔어야지.” 아이의 투덜거림을 계속됐고, 듣고 있던 나 역시 결국은 언성을 높였다. “한 번만 이야기하면 됐지, 계속할래? 네가 가고 싶은데, 가면 되잖아!” 결국 차 속 공기는 냉랭해졌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 세상이 바뀌는 아름다움과 그래서 갖게 되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사진 Nathan Fertig on unsplash]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 세상이 바뀌는 아름다움과 그래서 갖게 되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사진 Nathan Fertig on unsplash]

그러고 보니 시험 기간에 딸 아이가 남한산성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김훈 작가의 문장에 빠져버린 아이는 연이어 영화를 챙겨 보았고, 『남한산성』은 그렇게 아이에게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래서 언제든 가보고 싶은 곳으로 자리 잡았다. 시무룩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보니, 버럭하며 아이의 말을 막은 게 미안했다. 요즘은 이런 식이다. 잘 들어주면 되는 건데, 그걸 못하고 말을 끊는다.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 이건 좋은 핑곗거리가 아닌데 말이다.

갑자기 창밖으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오후부터 눈이 온다더니, 정말 내리기 시작하네. 남한산성 쪽으로 올라가면 더 많이 내리겠는데. 천천히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자고.” 남편의 예측대로 남한산성 공원 주차장에 이르자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더 있다가는 오도 가도 못하겠다는 생각에 주차장에 차를 대지 않고, 바로 다시 차를 돌려 산 아래쪽으로 향했다. 산 밑에 다다르자 이왕 이렇게 눈 속을 달려야 하는 거, 차 한잔 마시고 눈 구경이나 좀 하다가 가야겠다 싶었다.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찻잔을 앞에 두고 펑펑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자니 차 속에서 불편했던 마음은 어느새 다 풀어져 있었다. 멋진 설경을 배경으로 좋은 사진 한장 남겨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 연신 카메라로 창밖을 찍으며 감탄하는 딸 아이만 있을 뿐이었다.

창 밖으로 바라본 눈내리는 남한산성의 풍경, 길은 궂었지만 힐링의 순간이 됐다. [사진 김현주]

창 밖으로 바라본 눈내리는 남한산성의 풍경, 길은 궂었지만 힐링의 순간이 됐다. [사진 김현주]

소설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는 때도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963년 겨울, 눈 쌓인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이 된 조선의 조정, 척화파와 주화파의 분쟁, 무기력한 왕, 고통받는 백성들….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주변을 돌아보는 느낌이 다른데, 작품에 푹 빠진 아이는 어떻겠는가.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차를 돌려 이리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보라는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함께 어우러지는 미묘한 조합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경이로운 자연현상이라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특별한 자극을 일으킨다”는 한 미국 심리학자의 코멘트를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눈이 오면 세상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뀐다. 하얀 눈이 길을 덮고 나무 위에 쌓이면 익숙한 공간이 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아이처럼 들뜨기도 하지만,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것에 조심해야 하기에 긴장감도 생긴다. 순간적으로 현재가 바뀌는 상황이 눈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눈이 오면 세상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뀐다. 하얀 눈이 길을 덮고 나무 위에 쌓이면 익숙한 공간이 변하기 시작한다. [사진 김현주]

눈이 오면 세상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뀐다. 하얀 눈이 길을 덮고 나무 위에 쌓이면 익숙한 공간이 변하기 시작한다. [사진 김현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딸에게 설경은 『남한산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나에게는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이다. 눈은 세상을 달라 보이게 만들지만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주인공 시마무라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해 낸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도 말이다. 눈을 맞은 우리 두 모녀는 순식간에 불화를 잊고 서로의 감상에 빠져 그 시간을 즐겼다. 며칠 후에는 투정과 잔소리에 다시 서로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겠지 싶다. 그러다 보면 갱년기도 사춘기도 지날 테고 말이다.

가끔 서로에게 싫은 소리도 하는 모녀 지간이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겠지 싶다. [사진 김현주]

가끔 서로에게 싫은 소리도 하는 모녀 지간이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겠지 싶다. [사진 김현주]

쿠키 영상처럼 덧붙이자면 눈길을 뚫고 집으로 돌아오는 건 쉽지 않았다. 시속 30km 이하로 달려 2시간이 넘게 걸려 겨우 집에 왔지만, 그 시간 역시 나쁘지 않았다. 7080 가요부터 요즘의 힙합까지 번갈아 가며 신청곡을 틀어 대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왔으니까. 차창 밖으로 핀 눈꽃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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