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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한국판 백이·숙제…고향서 독립운동한 향산과 유천 형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6)

“유세차신축십일월병술삭십육일신축 유학(幼學) 진성 이동후가 감히 토지신(土地神)께 고합니다. 이번에 유천헌(柳川軒) 편액과 기문(記文)을 거니 신(神)께서 보호하시어 뒤탈이 없게 해주소서. 삼가 공경스레 술과 포를 올립니다.”

12월 19일 오전 11시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서 전통 현판식이 있었다. 현판식을 한 작은 한옥의 이름은 유천헌. 유천헌의 주손(胄孫)은 현판식에 앞서 건물이 자리한 땅의 신에게 먼저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며 행사를 알렸다. 이른바 고유(告由) 의식이다.

편액을 건 유천헌의 모습. [사진 송의호]

편액을 건 유천헌의 모습. [사진 송의호]

이어 유천헌 편액이 처마에 모습을 드러내고 안쪽 마루에는 유천헌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이 내걸렸다. 유천헌은 가운데는 마루, 양쪽으로 두어 평 정도의 방 하나씩이 붙은 작은 사랑채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 뜻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다.

1910년 일제의 침탈로 나라가 망하자 이 마을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가 단식 24일 만에 순국했다. 나라가 망한 데는 신하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적지 않다며 죽음으로 책임지는 지도층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향산은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한 뒤 양산군수‧공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나라가 망해가자 고향으로 돌아와 국권 회복을 도모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은 이후 독립운동을 각성시키는 작은 불씨가 되었다.

유천헌 마루에 걸린 유천헌기. [사진 송의호]

유천헌 마루에 걸린 유천헌기. [사진 송의호]

향산의 순국에 자극을 받아 이번에는 이웃에 살던 동은 이중언이 다시 단식을 벌이다가 27일 뒤 순국했다. 이 과정에서 향산의 아우인 유천 이만규는 밤마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동은을 찾아가 흐느끼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낸 동은과 홍문관 부교리 등을 지낸 유천 역시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하다가 향리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유천은 이후 파리장서운동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렀다. 그런 아픔이 숨은 곳이 이 작은 공간 유천헌이다.

동은이 순국한 뒤 이 집은 주인이 바뀌다가 유천의 4대손이 마지막으로 살았다. 유천헌이란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은 물에 잠기고 동은의 순국 현장은 하계마을 높은 지대로 옮겨진 뒤 최근 복원돼 이날 현판식을 한 것이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의 후손 마을로 퇴계 묘소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을 넘으면 시인 이육사의 고향이고 하계마을 옆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이 하계마을에선 독립유공자만 25명이 나왔다. 그러나 이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은 사실상 사라지고 겨우 몇 집이 남아 있다. 그러면서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자취도 사라졌다. 그런 중에 유천헌이 용케 보존된 것이다.

유천헌 현판식에서 이동후 주손이 마을 앞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박융곤]

유천헌 현판식에서 이동후 주손이 마을 앞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박융곤]

이날 유천헌 현판식에 참석한 정진영 경상북도독립기념관장은 “이곳이 바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기록한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향산과 유천 형제의 나라 사랑은 백이‧숙제와 다를 게 없다고 적었다.

현판 ‘유천헌’ 글씨는 퇴계의 글씨를 집자했으며 내력을 담은 유천헌기도 함께 걸렸다. 편액은 최근 도산서원의 도산기를 새긴 이정환 작가가 판각했다. 현판식과 관련 유천의 주손 이동후 씨는 “늦었지만 이 작은 공간이 독립운동의 아픔을 기억하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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