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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기다린 어머니 무죄 선고, 1분 늦은 아들이 못 들은 사연

중앙일보

입력

“법정에 못 들어가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41년을 기다린 어머니의 무죄 판결이었지만, 아들은 웃지 못했다. 선고를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 대신, 51년 전 숨진 형 전태일 열사를 대신한 자리였는데 그는 늦고 말았다. 이 여사의 아들 전태삼(71)씨는 어머니의 재심 결과를 현장에 취재를 나온 여러 기자들로부터 들었다. 전씨가 서울북부지법 4층 법정 문앞 복도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1분. 재판부가 선고를 끝내고 퇴장하는 즈음이었다. “예정된 판결 시간보다 1분 늦었는데….” 전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장에서]

지난 21일 오전 11시쯤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고(故) 이소선 여사의 재심 선고가 끝난 직후 4층 복도에서 기자들과 마주친 이 여사의 차남 전태삼(71)씨(가운데). 장윤서 기사

지난 21일 오전 11시쯤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고(故) 이소선 여사의 재심 선고가 끝난 직후 4층 복도에서 기자들과 마주친 이 여사의 차남 전태삼(71)씨(가운데). 장윤서 기사

이 여사는 전두환 신군부 독재 시절 계엄포고령을 어긴 혐의로 1980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태일 열사가 숨진 뒤 ‘노동자의 어머니’로 불리며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벌어진 일이다. 그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재심 판결을 이씨의 유족은 듣지 못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판결 선고는 예정된 시간보다 3분 일찍 시작했다. 이 역시 전씨에게는 한으로 남게 됐다.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북부지법에는 아침부터 취재진이 모여들었다. 약 3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402호 법정은 기자와 방청객들로 채워졌다. 선고가 시작되기 8분 전쯤 법정 경위는 방청석을 향해 “이소선씨 가족분들 오셨냐”고 한 차례 물었다. 전씨가 도착하기 전이었으니 대답이 없었다.

법원 관계자는 이날 방청석의 기자들에게 ‘주의 사항’도 전했다. “판사님이 워낙 선고를 간결하게 하는 스타일이시다. 빨리 끝나더라도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지 말고 법원 공보판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재판부의 ‘빠르고, 간결했던’ 선고 

판사 이미지그래픽

판사 이미지그래픽

법원 측의 친절한(?) 설명대로 재판장은 예정된 개정 시간인 오전 11시보다 일찍 법정에 들어섰다. 3분 일찍인 10시 57분에 들어와 판사석에 앉은 재판장은 “2021재고단10 망(亡) 이소선 판결 선고하겠습니다”라고 입을 열며 선고문을 낭독했다.

“그렇다면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은 범죄가 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

오전 10시57분에 시작된 판결 선고가 4분 만인 11시 1분에 끝났다. 41년 만의 무죄 판결은 재판장 스타일대로 간결하게 끝났다. 무죄를 선고한 재판장은 곧장 퇴장했다. 그는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의 평가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우수 법관’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부장판사다.

기자들도 선고 결과를 회사에 보고하기 위해 법정을 나온 오전 11시 1분쯤 전씨는 4층 복도에 서 있었다.

“그렇게 1분 만에 끝냈단 말이에요? 그게 끝이었나요?”
무죄 선고 소식을 전해 들은 전씨의 황당해 하는 표정에 결과를 알려준 기자들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족은 듣지 못한 “무죄”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씨가 지난 9월 9일 오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계엄포고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이소선 여사 재심 사건 첫 공판을 마치고 전태일 바보회 명함 액자를 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씨가 지난 9월 9일 오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계엄포고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이소선 여사 재심 사건 첫 공판을 마치고 전태일 바보회 명함 액자를 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전씨는 기자들에게 서운함과 분노를 동시에 드러냈다. 그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재심한 재판을 단 1분 만(※실제는 4분)에 끝내는 오늘의 현실을 이 나라의 법조인들에게 다시 한번 묻고 싶다”고 했다.

“왜 어머니를 전국에 수배해서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형사재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었느냐”고 말한 그는 “간단하게 무죄를 선고한 것에 뭐라고 할 수 없는 아쉬움과 법정에 들어가지 못한 심정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부모 임종을 못 지킨 아들을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한 기자도 있었다.

전씨는 지난 4월 검찰의 재심 청구가 결정되자 ‘전태일(全泰壹)’ 이름이 적힌 바보회 명함을 액자로 만들어 “전태일의 심정을 잊지 말아 달라”고 전달하기도 했다. 그에겐 너무도 큰 의미의 재판이었지만, 그는 늦었고 선고는 간결했다.

22일 전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백신 주사를 맞아 몸이 아픈 상황에서 변호인이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자 법원으로 향했다”며 “11시 정각에 법원에 도착했지만, 검사나 판사가 최소한 20분 정도는 판결의 의의와 과거사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줄 알았다”고 했다. 피고인을 대신하는 입장이었던 전씨로서는 결과적으로 검찰과 법원에 너무 큰 기대를 한 셈이 됐다.

전태일재단은 이날 판결에 대해 “우리는 이소선 어머니의 무죄 판결이 역사의 법정이 국가의 법정 위에 서는 마중물이 되리라고 믿는다”는 성명을 냈다.

法 “재판부의 시간 착오, 고의 아니었다”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21일 오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이소선 여사의 아들 전태삼 씨와 전두환심판국민행동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윤서 기자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21일 오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이소선 여사의 아들 전태삼 씨와 전두환심판국민행동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윤서 기자

눈에 띄지는 않았던 이날의 상황에 대해 법원 측은 ‘착오’라고 설명했다. 서울북부지법 관계자는 “선고를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시작한 것은 시간을 잘못 인식한 재판부의 착오 때문으로 보인다”며 “유족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고 시간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뤄진 일이지 고의로 유족 없이 선고를 강행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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