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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기업] [기고] 라디오의 온기, 다시 퍼져나가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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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대학입시에 떨어진 날. 나는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동병상련의 친구들과 달달한 막걸리를 마시며 낙방의 쓴맛을 삭이고 있었다. 눈이 펑펑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라디오에서 들었던 DJ의 오프닝 멘트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오늘 입시에 합격해 기분 좋은 분들도 있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분들도 좌절하지 말고 힘내세요. 어깨를 펴세요…” 그 목소리가 추운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위로의 손길로 느껴지며 코가 시큰해졌다. 이렇듯 라디오는 나를 위로해 준 상담사가 되기도, 희망과 낭만의 메신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영국의 뉴웨이브 그룹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로 라디오의 쇠락과 라디오스타의 퇴장을 예고한 것처럼, ‘청취자’란 지칭보다 ‘시청자’가 익숙해지는 시대가 됐다. 나 역시 34년간 방송기자로 일하며 ‘TV가 먼저’인 삶을 살았다.

그러던 지난 한여름, 나는 도로교통공단의 TBN 한국교통방송 본부장직을 맡으며 라디오가 아직 살아있음을 체감하게 됐다. TBN은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보도를 제외한 사실상의 종합편성방송을 송출하며 전국 12곳의 국내 최대 네트워크를 가진 라디오 방송국이다. 2020년 한국리서치 결과에 따르면 부산·광주 등 대도시에선 운전자 4명 가운데 1명이 듣는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8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20년도 라디오방송평가’에서 6년 연속 종합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라디오의 시대가 갔다고들 하나, 라디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필요한 이들에게 정보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TBN 구성원들에게 상전벽해로 변한 디지털미디어 바다에서 ‘돌처럼 가라앉지 않으려고 부단히 헤엄치는’ 라디오 방송사의 사례를 본받아 더 발전해 나갈 것을 당부했다.

2004년 영국 BBC는 ‘라디오 부문’이란 조직 명칭을 ‘오디오 부문’으로 바꾸고 스마트미디어 시대의 생존전략을 세웠다. 특성이 다른 디지털 채널 7개를 만들고 팟캐스트와 앱 등 오디오플랫폼 건설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세대와 젠더, 문화적 기호에 따라 ‘스핀오프’(쪼개기)하는 애플리케이션 BBC Sounds는 ‘오디오의 넷플릭스’가 될 정도로 대박 신화를 썼다. 미국의 NPR도 마찬가지로 BBC의 길을 밟았다. 팟캐스트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라디오 방송만큼의 협찬수익을 올렸고, 유튜브 뮤직채널 ‘Tiny desk concert’는 미국 대중음악계를 놀라게 할 만큼 초대박을 터뜨렸다.

이제 TBN은 물론 한국의 라디오 종사자들이 오래 생존하려면 BBC와 NPR이 구축한 ‘혁신 내비게이션’을 따라야 한다. 디지털오디오플랫폼으로 재무장한 ‘비욘드(beyond) 라디오’가 되면 전통적 라디오도 되살릴 수 있다. 팟캐스트가 뜨면서 라디오 청취율도 덩달아 오른 유럽의 최근 트렌드가 그렇다.

라디오가 죽지 않기를 염원했던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40여 년이 지난 오늘, ‘요란한 비디오 시대에 라디오가 오히려 더 빛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계시로 들린다. 그 옛날, 콧등을 시큰하게 했던 라디오 혹은 오디오만의 온기가 다시 널리 퍼져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우호 도로교통공단 TBN 한국교통방송 방송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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