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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우린 ‘냉장고 인류’…메타버스 외 냉장고도 대비해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31·끝)

냉장고를 구매한 뒤 설명서를 읽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그만큼 모두가 냉장고의 기능에 익숙해진 탓이다. 냉장고를 사용하는 게 당연해졌고, 원래부터 부엌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고동락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냉장고 사용설명서가 나왔다. 바로 『냉장고 인류』라는 제목의 책은 냉장고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명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왜 필요할까.

모두 냉장고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냉장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까. 과연 이 제품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을까.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것일까. 당연히 필요하다고 믿고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던 물건이기에,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세밀한 관찰과 천착을 거듭하면서 설명서는 두꺼워졌다.

냉장고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냉장고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삶은 얼마나 변했는지, 냉장고와 저온 유통 체계의 발명은 우리의 식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식품의 유통과 세계 식량 체계는 우리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줬는지, 그런데 누군가는 왜 계속 굶어 죽는 현상이 벌어지는지, 음식을 저장하려고 냉장고를 사용하는데 왜 음식쓰레기는 더 늘어나는지, 냉장고 이외에 식품 보관에 관한 대안은 있는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설이 설명서에 담겨있다.

냉장고 인류. [사진 글항아리]

냉장고 인류. [사진 글항아리]

이 설명서는 [더,오래]에 연재된 30편의 ‘냉장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어졌다. 그동안 칼럼은 부엌·음식·건강·환경·사회 문제·자본주의와 대량생산·미래 식량 등 냉장고를 둘러싼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뤄왔고, 저마다 집에 냉장고 하나쯤은 사용하고 있기에 많은 독자에게 기대 이상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댓글은 책의 각 장 시작 부분에도 소개했다. 마치 독자들과 함께 책을 엮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칼럼 글은 전시 기획으로까지 이어졌다. ‘냉장고 환상’이라고 이름 붙인 전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2021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개최됐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글과 전시 콘텐츠로 발전하는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전시는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일 최다 관람객 수가 1000명을 넘었고, SNS와 블로그 등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전시는 이제 책으로 재탄생해 독자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냉장고 인류’이다. 훗날 한 역사가는 20~21세기를 냉장고 시대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만이 대비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냉장고는 우리의 삶을 서서히 지배해왔다. 이런 점에서 나는 냉장고가 메타버스보다 더 무섭다. 사람들이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이 설명서를 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지금까지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를 사랑해주신 많은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가움의 연대기.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냉장고 환상']

차가움의 연대기.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냉장고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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