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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안보 덧씌운 ‘디지털 지정학’에 주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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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진화하는 미·중 글로벌 패권경쟁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중 기술경쟁의 파고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최근 두드러진 현상은 기술과 안보의 만남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공지능(AI), 무인로봇, 빅데이터, 모바일, 클라우드 컴퓨팅, 사물인터넷, 가상현실, 3D 프린트 등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 미래국력의 핵심으로 인식되면서 기술은 국가안보의 프레임이 씌워져 강조된다. 미·중 기술경쟁은 기술 그 자체를 놓고 벌이는 경쟁의 의미를 넘어 지정학적 갈등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지정학’이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최근 디지털 지정학의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5G 이동통신장비 기술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다. 5G 분야에서 앞서가는 중국기업 화웨이(華爲)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국가안보를 빌미로 수입 제재의 조치를 취했다. 화웨이 제품에 심어진 백도어를 통해 미국의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데이터와 정보가 빠져나간다는 논리가 내세워졌다. 화웨이의 공급망을 옥죄는 수출통제 조치도 취해졌다.

사활을 건 미·중 기술 경쟁에
국가안보 프레임 씌워지고 있어
AI 활용해 미래전 노리는 중국
국방건설과 경제발전 통합 나서

중국이 자체 개발한 슈퍼컴퓨터 선웨이 타이후라이트. 미 상무부는 지난 4월 미국의 안보에 반한다며 중국 슈퍼컴퓨터 운영기관과 관련 기업 7곳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사진 비쥬얼차이나]

중국이 자체 개발한 슈퍼컴퓨터 선웨이 타이후라이트. 미 상무부는 지난 4월 미국의 안보에 반한다며 중국 슈퍼컴퓨터 운영기관과 관련 기업 7곳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사진 비쥬얼차이나]

안보를 구실로 한 미·중 기술갈등은 반도체, CCTV, 드론, SNS 서비스 등으로 확장 중이다. 이는 지구화 과정에서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의 와해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은 정보동맹인 파이브아이즈(Five Eyes) 국가들까지 동원해 중국의 기술적 약진을 제어하려 한다. 이런 대결은 군사안보 분야로도 옮겨져 미·중 간에는 첨단 군사기술경쟁이 전개된다.

이 분야를 주도하는 국가는 단연코 미국이다. 2014년 발표된 미국의 ‘제3차 상쇄전략’은 미래전에서 미국의 군사력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 최첨단 기술혁신을 위해 설계됐다. 2018년 신설된 합동인공지능센터(JAIC)는 미 국방부 AI 전략의 핵심이다. AI 기술의 도입은 미래전의 수행을 염두에 둔 작전운용 방식과 국방시스템의 혁신도 유발하고 있다. 지난 8월 미 육군 미래사령부는 2026년까지 집중 투자할 AI 연구영역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미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구도에서 군 현대화를 추진하며 AI를 장착한 자율무기체계(AWS) 개발에 임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민간산업 분야의 AI 기술을 활용해 미국과의 격차를 빠른 속도로 좁히고 있다. 인간이 주도하는 육·해·공의 전통적인 전쟁에선 미국을 넘기 어렵지만, AI를 기반으로 한 미래전에선 미국과 겨뤄볼 만하다는 것이 중국의 속내다.

중국의 AI 무기 개발은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해 10월의 19차 당 대회에서 ‘AI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한 경제·사회·군사 영역의 인공지능화’를 강조했다. 중국은 육·해·공 전 분야에서 자율살상의 능력까지도 갖춘 AI 무기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017년 과학전문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표지 기사로 게재된 중국의 양자정보통신위성 묵자호(墨子號,). [중앙포토]

지난 2017년 과학전문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표지 기사로 게재된 중국의 양자정보통신위성 묵자호(墨子號,). [중앙포토]

중국은 또 2016년 세계 최초의 양자(Quantum) 위성통신인 ‘묵자’를 발사한 데 이어 2017년엔 베이징~상하이를 잇는 2000㎞ 구간에 유선망을 구축해 양자 암호통신을 성공시켰다. 양자 기술은 물리학 최소 단위인 양자의 특성을 보안·초고속 연산 등에 적용한 차세대 정보통신기술이다. 지난해 8월 미 의회가 중국의 AI 기술과 함께 양자 기술이 미국의 국방을 위협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낸 배경이다. 중국은 최근 미국이 앞서 있는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지난 8월에도 미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중국이 음속의 5배 이상으로 날아가는 극초음속 미사일의 발사실험을 공개한 것이다. 미 정책서클에선 중국의 이런 군사혁신이 미·중 간에 벌어질 미래전의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도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을 ‘매우 중대한 기술적 사건’이라 규정하며 구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해 미국을 놀라게 한 ‘스푸트니크 순간’에 빗대기도 했다.

한데 이러한 도전의 이면에 중국의 ‘군민융합(軍民融合)’ 모델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시진핑 집권 후인 2013년부터 줄곧 군민융합을 강조해왔는데 그 핵심은 국방건설과 경제발전을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한정된 자원을 전투력과 생산력으로 전환하려는데 있다. 과거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군이 주도하는 군사혁신 모델이었다면 중국은 당과 정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며 군의 기술혁신 성과를 활용해서 민간을 포함한 국가기술 전반에서 미국을 추격하려는 모델을 모색 중이다.

자연히 민군 겸용의 첨단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도 미·중 간 뜨거운 감자다. 미국은 2018년의 ‘수출통제개혁법(ECRA)’ 이외에도 올해 ‘전략경쟁법’이나 각종 행정명령을 통해 대중국 기술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엔 중국에 대한 기술통제가 민군의 경계가 모호한 민간기업에 대한 제재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6월 중국군과 관련된 방산 분야의 기술기업들, 즉 핵과 항공, 석유, 반도체, 감시기술 분야의 59개 기업에 대해 미국의 투자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게 그런 예다.

중국 포털기업 바이두는 지난 8월 세계 최대 AI 오픈소스 플랫폼 중 하나인 바이두브레인 7.0 최신 버전을 공개했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 포털기업 바이두는 지난 8월 세계 최대 AI 오픈소스 플랫폼 중 하나인 바이두브레인 7.0 최신 버전을 공개했다. [중국 바이두 캡처]

이러한 연속 선상에서 지난 11월 미 상무부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수출규제 대상 기업을 지정한 조치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제재 리스트엔 대(對)스텔스 및 대(對)잠수함 용도의 무기개발을 위한 양자 컴퓨팅과 암호화 기술에 관련된 8개 중국 기업이 포함됐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이들 기업은 미국이 원천기술을 확보한 첨단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에 연루됐다. 특히 중국기업 최초로 양자 기술 분야에서 상장한 퀀텀씨텍이 미국의 수출 제재를 받았는데, 군사용 애플리케이션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품목을 구매한 혐의였다.

최근 미·중 기술경쟁엔 국가안보의 프레임이 착색되고 있다. 디지털 인프라의 사이버·데이터 안보와 공급망의 경제안보 문제가 불거지고 AI를 탑재한 무기, 양자 기술의 군사적 활용, 극초음속 미사일의 도입 등과 같은 군사안보 문제가 쟁점이다. 게다가 미·중 기술안보 갈등은 수출입 규제, 동맹 및 연대외교, 규범 및 가치의 경쟁 등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디지털 지정학이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 중이다. 이런 변화가 중견국 한국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미·중은 디지털 안보 표준 장악 위해 사투 중

2019년의 세계경제포럼(WEF)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발달 문제를 ‘지정학적 위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기술발달이 불균등 성장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나아가 정치적 갈등과 지정학적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경쟁은 이런 불평등과 갈등 및 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최근 벌어지는 미·중 기술경쟁의 양상은 지정학적 위기를 낳을 조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상은 ‘디지털 기술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의미로 ‘디지털 지정학(Digital Geopolitics)’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디지털 지정학의 초기 쟁점이 사이버 안보였다면, 이러한 안보위협이 양적으로 늘고 있을 뿐 아니라 여타 다양한 안보 문제와도 연계되고 있다.

최근 미·중 기술경쟁의 불꽃이 기술·산업 분야를 넘어 무역·경제 분야로 번지고 더 나아가 군사안보와 동맹외교, 국제규범 등이 관련된 분야로 파급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중 기술경쟁은 이제 양국 간 사활을 건 글로벌 패권경쟁으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디지털 기술안보가 지정학적 문제가 됐다지만 이게 단순히 전통적인 고전지정학의 시각으로 회귀해 문제를 보자는 건 아니다. 오늘날의 기술안보는 기본적으로 사이버 공간을 매개로 이뤄지는 탈(脫)지리적 공간의 안보 문제라는 속성을 지닌다. 게다가 글로벌 시장을 배경으로 해 영토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의 비(非)지정학적 활동이 저변에 깔렸다. 디지털 기술안보의 진화 과정에선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위협의 존재만큼이나 그 위협을 주관적으로 구성해내는 담론정치의 과정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디지털 기술안보의 세계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전통 지정학의 협소한 시각에만 머물지 말고 최근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개발된 다양한 이론적 논의를 엮어내는 새로운 지정학의 시각, 이른바 ‘복합지정학(Complex Geopolitics)’의 시각이 필요하다. 복합지정학으로 본 미·중 기술경쟁은 좁은 의미에서 본 기술경쟁의 차원을 넘어 디지털 안보 분야의 기술과 표준 및 규범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