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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덴절 워싱턴의 미 졸업식장 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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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덴절 워싱턴(67)은 할리우드 스타다. 지금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핫’한 배우는 아니지만 얼굴과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10년 전인 2011년 5월 16일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식장을 찾아 연설을 했다. 20분 분량의 연설 곳곳에서 청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덴절 워싱턴은 그러면서 자신의 메시지까지 담아 내놨다. 다음은 그중 하나다.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겁니다. 제 아내가 이런 멋진 말을 해줬는데요. 당신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얻으려면, 결코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If you don’t fail, you’re not even trying. My wife told me this great expression. To get something you never had, you have to do something you never did)”

10년 전 메시지, 지금 더욱 절실
“실패 없었다면 시도도 안 한 것”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져라” 당부
현실 바꾸려면 행동으로 나서야

졸업식 연설은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내놓은 조언이자 경험담이다. 덴절 워싱턴이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생들에게 했던 이 연설의 메시지는 ‘앞으로 넘어져라(fall forward)’였다. 세상을 향해 뛰어드는 불안한 청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한때 한국에선 좌절한 젊은이들을 향해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위로하는 힐링이 유행했다. 힐링에 연예인들까지 가세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보통의 젊은이들에게 벽은 더 높아졌고 현실은 더욱 힘들어졌다.

할리우드 배우 덴절 워싱턴. [AP=연합뉴스]

할리우드 배우 덴절 워싱턴. [AP=연합뉴스]

이런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게 10년 전 덴절 워싱턴의 연설이다. 그는 사회로 나가는 청춘들을 위로하는 대신 행동을 요구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 실패하게 돼 있다”며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지라”고 말했다.

연설 하나를 듣고서 누군가를 호평하거나 미화하는 건 순진한 접근법이다. 글솜씨가 있는 대필 작가가 덴절 워싱턴의 구술을 듣고 연설문을 대신 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연설에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인 흑인, 유색인종이 겪는 한계라는 배경 화면을 입히면 의미가 달라진다.

미국에선 여전히 피부색이 사회경제적 좌표를 추정하는 레퍼런스 중 하나다. 미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미국의 실업률은 5.2%인데, 이중 흑인 실업률은 8.4%다. 백인 실업률(4.6%)은 전체 평균보다 낮다. 사회에 진출하는 20대 초반(20∼24세)으로 좁힐 경우 전체 실업률이 8.8%인데, 이 연령대의 흑인 젊은이들 실업률은 14.3%다. 같은 연령대의 백인 실업률은 7.4%다. 미 인구조사국(USCB)의 인종별 가구 구성 조사(2021년)에 따르면 백인에선 부부가 모두 있는 가구는 58%, 편모 가구가 6%였다. 반면 흑인에게선 부부가 모두 있는 가구는 33%로 줄고, 편모 가구는 19%로 늘었다. 미국에선 기대수명도 인종 별로 차이가 있다. 2020년 기준 기대수명은 77.3세인데 흑인은 이보다 낮은 71.8세다. (국가주요통계시스템 7월 보고서) 또 흑인 남성의 기대수명 68세는 북한 남성의 2018년 기대수명 68.4세(세계은행 추정치)보다 낮다. 미국에서 이런 통계를 무수히 찾을 수 있다.

이같은 제약을 극복할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이들에게 미국 사회는 ‘이생망’이나 다름없다. 덴절 워싱턴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어릴 적) 어울렸던 친구들의 형량을 모두 합치면 한 40년 정도는 될 것이다. 거리가 그들을 놔두지 않았다”고 했다. 미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미국인 10만명당 358명 꼴로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성별로 보면 남성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678명이 수감돼 있다. 그런데 흑인 남성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1890명으로 평균을 크게 상회한다. 흑인 남성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감돼 있다는 건 이들이 범죄 환경에 더 많이 노출돼 있거나, 같은 범죄에도 이들이 더 가혹한 대우를 받거나, 아니면 둘 다 일 수 있다. 나는 이런 현실에서 덴절 워싱턴이 찾은 해법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얻으려면, 결코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였다고 생각한다.

불안한 청춘은 위로받아야 하지만 위로만으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위로를 통해 힘을 얻었다면 행동에 옮겨야 현실에 변화가 올 수 있다. 또 지금의 현실은 내 잘못이 아니며 기성세대의 책임이지만, 현실을 바꾸려면 결국 내가 행동해야 한다. 내 삶의 주체는 나이고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할 수 없어서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감히 권하고 싶은 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얻으려면, 결코 해본 적 없는 일을 하라”는 미 흑인 배우의 졸업식 연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