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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15연패 끝에 1인자 꺾은 2인자 오유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여자바둑의 2인자 오유진 9단이 무적의 1인자 최정 9단을 연달아 꺾었다. 하림배여자국수전에서 2대1로 타이틀을 따내더니 곧이어 벌어진 한국제지 여자기성전에서는 2대0 완승으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난공불락의 ‘최정 왕국’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지난주 TV에서 이 두 사람의 승부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세상사의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유진 23세, 최정 25세. 보통이라면 세상에 막 나서는 나이지만 프로기사로서 이 두 사람의 바둑역사는 길다. 최정은 2012년 첫 우승을 했으니 벌써 9년 전이다. 이후 국제대회 7번 포함 21회 우승했다. 이달에도 오청원배 세계대회서 우승했다.

여자바둑에서 무적이었고 남자기사들과의 싸움에서도 최정의 분투는 놀라웠다. 중국랭킹 2,3위를 오가는 구츠하오 9단, 세계챔프 스웨 9단 등을 꺾었고 여자로는 유일하게 KB바둑리그에 참여해 매서운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오유진은 5년전인 2016년 첫 우승을 거뒀고(궁륭산병성배 세계대회) 같은 해 여자국수전에서 우승하며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오유진은 여기서 멈추고 만다. 바로 최정이란 존재 때문이다. 특히 2017년 봄부터 올해 가을까지 4년여 동안 오유진은 최정에게 무려 15연패를 당하고 만다. 최정이 아니면 이기지만 최정에겐 진다. 오유진은 최정이란 철벽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11월의 여자국수전 결승에서 오유진이 3번기 첫판을 이겼다. 15연패를 마감하는 눈물겨운 승리였다. 2국은 져 1대1. 역시 최정에겐 힘든가보다 싶을 때 최종 3국에서 오유진이 이겼다. 최정을 꺾고 우승한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주 오유진은 여자기성전 결승에서 다시 최정과 마주 앉았다. 결과는 2대0. 오유진 승리. 어떻게 이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9월까지 연전연패하다가 겨우 두 달 후 무엇이 바뀐 것일까. 오유진의 얘기를 들어봤다.

최정 9단을 이긴 소감은.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최정 9단은 나의 오랜 숙제이고 너무 큰 숙제였다. 그 숙제를 조금 해결한 느낌이다.”
이번 승리 이전에 상대전적이 2승 25패였다. 참으로 많이 졌더라.
“참 많이 졌다. 자꾸 지다보니 정신적으로 위축됐고 자신감을 잃었다. 한번은 넘어서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한번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타이틀전에서 잇달아 두 번이나 승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오랫동안의 마인드컨트롤과 AI 공부가 효과를 본 것 같다. ‘겁내면 결코 이길 수 없다, 나를 믿어야 한다’고 끝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천하의 고수라 하더라도 AI에게는 두 점씩 놓고 둔다는 점도 위안이 됐다. 세상에 무적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번 결승전을 놓고 내용이 훌륭하고 오유진이 크게 달라졌다는 평가다.
"겨우 한고비 넘었고 아직 갈 길은 멀다. 상대전적(이번 결승전 포함 6승 26패)이 말해주듯 최정9단은 여전히 높은 산이다.”
AI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AI는 오유진에게 어떤 존재인가.
"과거에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잘 두는 선배의 말이 정답이거니 싶으면서도 믿음은 작았다. 한데 AI는 정답을 알려준다.”
AI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모든 프로기사의 과제가 됐다. 오유진의 방식은.
"AI가 제시하는 포석의 수많은 길 중에서 내게 맞는 길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중반 이후엔 어차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바둑 스타일을 확보하는 것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지 않을까.”
내년의 목표를 미리 말한다면
"세계대회서 우승하고 바둑리그에도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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