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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만명 손 닿은 자리에 ‘굴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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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

바다는 온통 기름 덩어리였다. 주민들은 시커먼 기름 파도를 보며 망연자실해 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수건·양동이 등 닥치는 대로 들고 바다로 나섰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달려와 기름을 걷어냈다.

전 국민적인 노력 덕분에 바다는 빠른 속도로 청정함과 푸르름을 되찾았다. 겨울철 별미인 굴을 비롯해 태안반도 수산물도 돌아와 다시 사랑받고 있다. 14년 전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피해를 말끔히 씻어낸 충남 태안 앞바다 이야기다.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정종배씨 비닐하우스에서 이 마을 어르신들이 굴을 까고 있다. 14년전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피해를 본 태안군은 주민과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 노력으로 청정해역을 완전히 되찾았다. 겨울철 별미인 태안 굴은 택배 등의 방식으로 전국 곳곳으로 판매된다. 프리랜서 김성태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정종배씨 비닐하우스에서 이 마을 어르신들이 굴을 까고 있다. 14년전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피해를 본 태안군은 주민과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 노력으로 청정해역을 완전히 되찾았다. 겨울철 별미인 태안 굴은 택배 등의 방식으로 전국 곳곳으로 판매된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3일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어민 정종배(76)씨가 설치한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인 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어르신들은 정씨가 전날 파도리 앞바다에서 채취해온 굴을 까고 있었다. 굴 까는 도구인 ‘조새’로 굴 껍데기 모서리를 쫄 때마다 유백색의 통통한 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민 문숙희(66)씨는 “기자 양반, 굴 좀 드셔”라며 권했다. 굴을 입에 넣자 특유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정씨는 “기름 사고가 난 뒤 6~7년 동안 굴이 생산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푸른 바다를 완전히 되찾았고, 굴 수확량도 사고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태안군은 요즘 소원면을 포함해 원북·이원·근흥면, 안면읍 등 해안 전역에서 굴 수확이 한창이다. 대부분 자연산인 태안산 굴은 겨울철 별미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태안군 고현정 수산산업팀장은 “태안산 굴은 어민들이 택배 등으로 개별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어획량을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기름 유출 사고 전보다 인기가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태안산 굴은 50여곳에 달하는 이 지역 음식점에서 쉽게 맛볼 수 있다. 소원면 마을주민들이 추천한 ‘굴향’은 굴요리 대표 음식점 가운데 하나다. 굴밥·굴전·굴무침·생굴·굴보쌈·굴국밥 등 어지간한 굴 요리는 다 있다.

대부분 자연산 … 전국에서 태안 굴 찾아

태안군 태안읍에 있는 음식점 ‘굴향’에서 굴밥·굴무침 등 굴요리를 선보였다. 프리랜서 김성태

태안군 태안읍에 있는 음식점 ‘굴향’에서 굴밥·굴무침 등 굴요리를 선보였다. 프리랜서 김성태

태안읍내에 있는 이 식당을 찾아 직접 몇 가지 굴 요리를 주문했다. 이 가운데 굴밥은 대추·인삼·콩나물 등을 함께 넣어 지었다. 뜨끈한 솥 밥에 살이 통통한 굴을 푸짐하게 올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밥을 양념장에 비벼 김에 싸서 먹으니 감칠맛이 돌았다. 갖은 양념과 채소를 버무린 굴무침은 새콤달콤한 맛 때문에 젓가락을 멈출 수 없게 했다.

음식점 주인 정미선씨는 “태안 등 서해에서 생산한 굴은 만조 때 물을 빨아들여 영양분을 섭취하고, 간조 때 햇볕을 쬐면 향이 더 강해진다”며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져야 제맛이 나고 영양분도 많아진다”고 했다. 미네랄 덩어리로 알려진 굴은 에너지원인 글리코겐이 많고, 비타민·철분·아연·구리도 풍부하다.

이런 태안의 명품 굴을 다시 맛보기까지는 시련도 겪었다.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6분에 겪은 사상 최악의 재난이었다. 당시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 앞바다에서는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과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유조선에 구멍이 나면서 원유 1만2547㎘가 바다로 쏟아졌다.

역한 기름 냄새에 쓰러져도 포기 안해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 등이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태안군]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 등이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태안군]

원유는 조류를 타고 해안으로 흘러 태안을 비롯해 70㎞에 달하는 충남 서해안 6개 시·군 해변을 뒤덮었다. 모래사장과 바위는 온통 검은 기름 투성이었다. 전날까지 굴을 따고 조개를 캐던 바다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집집이 양동이와 수건 등 기름 제거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들고 바다로 향했다. 바닷물과 범벅이 된 기름 덩어리를 퍼내고 바위를 닦았다. 소원면 파도리 최장열 어촌계장은 “당시는 기름을 어떻게 방제할지 방법도 몰랐고 장비도 없어 맨손으로 하다시피 했다”며 “역한 기름 냄새에 작업 도중 쓰러지는 주민도 많았다”고 말했다.

국민들도 재난을 외면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123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사고 현장을 찾아 기름을 걷어냈다. 자원봉사자에는 외국인도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 등은 태안을 찾아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전 국민적인 기름과의 사투는 사고 발생 2년이 흐른 후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2009년 말부터 생태계 복원 청신호가 나타났다. 바지락 폐사율이 4.7%로 2008년 24.6%에 비해 급감했다. 태안 연안 해수 유분 농도는 전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2016년 6월에는 멸종 위기종인 상괭이 100여 마리가 태안 앞바다에서 무리 지어 헤엄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세계는 이를 ‘서해의 기적’이라 했다.

만리포해수욕장에는 국민이 땀과 눈물로 일궈낸 희망의 서사시를 기록한 유류 피해극복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름 피해가 난지 10년 뒤인 2017년 6월 충남도가 문을 연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연면적 2624㎡) 규모다. 사업비는 총 104억 75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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