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키호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나귀와 까미노길 800km를 걸었다. 까미노란 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가는 모든 길을 말한다. 이 중 내가 걸은 까미노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드에서 시작해 ‘프랑스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당나귀 호택이는 걷는 내내 만난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동키호택이란 이름도 한몫을 했다. 현지의 한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돈키호테를 아시아적 특이한 억양으로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한국인이 스페인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를 이상하게 발음했다는 것이다. 당나귀 이름을 물어볼 때 ‘동키호택’이라고 하면 배꼽 잡은 이유를 알게 됐다. 이 여행을 호택이와 함께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당나귀는 나와 까미노에 사는 스페인 사람들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였다. 까미노에 사는 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당나귀에게 애정을 보였다. 남녀노소 누구나 호택이를 보면 스스럼없이 다가와 능숙하게 껴안고 쓰다듬었다. 당나귀가 바싹 마른 빵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신기했지만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까미노 순례자들의 짐을 날라주는 택배 서비스 이름이 ‘동키서비스’다. 그저 누군가의 재미있는 아이디어인 줄 알았으나 그 뒤에는 역사가 녹아있다. 이곳 사람들의 삶과 당나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랜 세월 동안 까미노 순례길은 유통의 강물이었다. 템플기사단(성지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사 수도회)은 성직자와 순례객과 상인들의 보호막이었다. 덕분에 이 길은 이슬람 세력과 강도들의 위협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그 물류의 중심에 당나귀가 있었다. 당나귀는 그네들 삶의 한축이었다. 그런 당나귀와 길을 걷는 동양인의 모습이 어찌 즐겁지 않을까.
당나귀는 하루에 20킬로 이상을 걸으면 힘들어한다. 시속 5킬로 정도이니 4시간 정도 걸으면 될 일이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내쳐 걷지는 않는다. 걸은 시간만큼 풀을 뜯는다. 한 고집하는 당나귀 아니던가. 이번 여행은 철저하게 호택 이에게 맞췄다. ‘당나귀가 가면 나도 가고 그가 서면 나도 선다.’ 이 말을 하면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이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번 까미노 여행을 세 구간으로 구분해 보았다.
첫 번째는 ‘의지의 길’이다. 모든 것을 내 생각과 고집으로 하려던 기간이다. 프랑스 국경에서 시작하여 부르고스까지 약 300km 구간이다. 힘 넘치고 의욕이 충만해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다.
두 번째 구간은 ‘상실의 길’이다. 부르고스에서 레옹 이르는 약 200km다. 이 길은 ‘식탁’이라는 의미의 메세타 평원을 지나는 구간이다. 지형이 평평하고 곡창지대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테다. 만만하게 보았는데 웬걸 물과 그늘이 부족했다. 뜻하지 않게 발톱 염증과 발목 부상으로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 의지가 꺾이기도 했지만 ‘천사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낸 곳이기도 하다. 천사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순례자와 주민들이다.
마지막 구간은 ‘회복의 길’이라 말하고 싶다. 내 의지는 메세타를 지나며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때 호택이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호택이는 현지인들과 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였다. 사람들은 그 징검다리를 건너 내게 오고, 나는 그 다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을 주고 재워 주고 약을 건네줬다. 호택이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나를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종반에 들어갈 즈음 사라고사에서 온 한 쌍의 순례자를 만났다. 결혼을 앞두고 까미노를 걷는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의 두 발바닥이 모두 들떠 걷는 고통이 아주 심했다. 나는 여자에게 배낭을 날라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호택이의 짐과 내 배낭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나흘 동안 함께 걸으며 회복한 그녀는 웃으며 떠났다. 진짜 동키서비스를 한 셈이다. ‘행복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구간이다.
산티아고 입성을 하루 앞둔 아침에 일어나보니 숲속에 있어야 할 호택이가 사라졌다. 끈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누가 끌고 갔다면 큰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4시간을 허둥지둥 찾아다니다가 1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했다. 나를 본 호택이가 고개를 쳐들며 달려오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 소리 없이 울었던 날이다. 호택이를 찾아준 스페인 경찰의 친절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드디어 도착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는 굵은 비가 내렸다. 희열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오브라이도 광장에서 비를 흠뻑 맞으며 호택이를 꼭 껴안았다. 프랑스 국경을 떠난 지 71일 만의 일이었다. 갈리시아 신문에서 우리를 본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어떤 이는 신문을 들고 오기도 했다.
호택이는 다시 제 놀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호택이의 본래 주인인 아리츠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헤어지려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멀어지는 호택이게 외쳤다.
“호택아 네가 진짜 순례자야. 나는 가짜였어.”
마지막으로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야고보의 시신이 도착했다는 파드롱(Padron)이다.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진 동네다. 이곳에 야고보의 시신을 싣고 온 배를 묶었다는 돌기둥이 있다. 성당에 들어서니 예수를 태운 실물 크기의 당나귀 동상이 있었다. 내 눈에는 호택이로 보였다.
까미노여행을 시작한 지 80일, 솅겐 조약이 규정한 유럽체류기간 90일을 꽉 채우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