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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최대 승부처 ‘53%의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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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편집인

최훈 편집인

유력 후보 부인·아들 등의 문제로까지 선택의 어지러움이 가중된 대통령 선거다. 직선제 이후 대선은 네거티브 공방 속에서도 모두 지도자를 골라낼 나름의 시대정신이 지배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 속에 “과도기 국정 안정”이 최대 다수(역대 최저득표였지만)로 권력을 거머쥐었다. 김영삼(문민 정부)·김대중(수평적  정권 교체) 대통령은 오랜 민주화의 갈망을 풀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득권, 부정부패와 대통령 아들·측근 비리에의 분노로 새 정치를 희구하는 변화를 담아냈다.

유일한 기업가 출신 대통령인 이명박의 등장은 이념의 ‘말’에 지친 나머지 실물 경제 도약에의 기대감이 바탕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신뢰”와 “경제 민주화”를 통한 중도층 포용에 성공, 첫 여성 대통령의 역사를 새겼다. 문재인 대통령의 승리는 “촛불 탄핵을 정권 교체로 마무리해 구시대 적폐를 청산하자”는 다수 열망의 결과였다. 지나고 보면 말도, 탈도, 흠도 많고 분노와 증오의 앙금마저 쌓인 대통령들이었다. 하지만 투표 당시 그를 선택한 국민과 시대의 요구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 있던 건 그들이었다.

유일한 과반의 지표는 “정권교체”
문 정부 차별화가 관건인 이재명
준엄한 ‘교체’ 책무 안은 윤석열
53% 민심에의 대응이 승패 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달인 닉슨의 워터게이트 위선에 분노한 미국민은 땅콩농장 주인 카터로 그를 대체했다. 이란 대사관 인질 참사로 자존심이 만신창이가 되자 레이건(위대한 미국), 아버지 부시(선을 위한 미국의 힘)를 소환했다. 클린턴(경제 부흥)의 스캔들 이후엔 다시 기독교적 정의감을 인정받은 아들 부시를 골랐다. 첫 소수인종 대통령인 오바마는 변화와 개혁, 다양성과 화합이란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었다. 트럼프(다시 위대한 미국)의 일탈에 절망한 그들은 “정상화된 민주주의 국가 리더”를 내건 바이든으로 그의 오만을 심판했다.

우리의 이번 대선에선 이 같은 거대한 시대정신조차 잘 감지되지 않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당선 뒤 표변한 대통령들의 독선에 지쳐온 탓에 기대치가 아예 사라진 때문일까. 비호감도가 훨씬 더 높은 유력 후보들의 그릇 자체가 작아진 탓도 있겠다. 그나마 가장 뚜렷하고 변함없는 과반의 민심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정권 교체’다. “현 정권을 바꾸는 것만이 최우선 유일 해법”이라고 그냥 읽어달라는 것이라면 이 역시 나름의 시대정신이 아니라 부정할 길도 없겠다.

야당 후보로의 정권 교체 지지는 53%, 여당 후보 당선 지지는 36%(이하 한국갤럽 12월 1~3주 조사)다. 사람 문재인만 교체하자는 의미는 물론 아닐 터다. 불만 쌓인 정책을 혁파하고 새로운 국가로 변화하라는 주문일 게다. 53%의 본질은 ‘효율’이나 ‘글로벌 스탠더드’는 간과한 채 ‘형평’이나 ‘이념’만을 앞세운 수많은 국정의 오류들을 즉시 수정해 달라는 요구다. 과속의 최저임금 인상, 유연함이 없던 주52시간제, 중과세 징벌만의 부동산 정책, 탈원전, 대북 유화 일변도, 희망 없는 청년의 삶, 특정 진영의 국가 인사 독점···. 시장의 논리보다 국가의 규제를 극대화하고, 자본주의보다는 숫자의 민주주의로 밀어붙인 모든 정책을 부디 정상화 해달라는 준엄한 지시다.

조국 사태 당시 권력이 그를 옹호하며 보여준 ‘내로남불’의 위선에 대한 실망과 혐오 역시 53%의 심리에 녹아 있다. 대선의 승부처? 이 53%의 해석이다.

이재명 후보로선 딜레마다. 자신의 후보 지지율(36%)이 문 대통령(37%)보다 낮다. 이 후보가 추진 중인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1년 유예에 청와대는 쌍심지를 켜며 반대한다. 자신의 영혼만은 지켜내려는 문 대통령의 자존심일 수 있다. 차별화해 문 정권을 부정하려니 친문의 37% ‘집토끼’가 아쉽고, 추종만 하려니 53%의 쓰나미가 두렵다. 도다리 눈치로는 자칫 36~37%의 진영 내 지지도에 갇힌다. 무난한 패배가 아닐는지 불안할 뿐이다.

이 후보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경 편성, 공시지가제 전면 재검토, 탈원전 아닌 감(減)원전 기조 등 곳곳에서 청와대와의 기싸움 속에 오락가락하자 말의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분위기다. 이 후보가 다시금 명심할 교훈은 53%가 국정을 교체하라는 것이며, 모든 적(敵)은 늘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기회? 대통령 후보는 문재인이 아닌 이재명이라는 사실이다.

더욱 답답한 건 국민의힘이다. 윤석열 후보와 당의 지지율은 35%, 33%다. 53%의 열망을 이뤄줄 ‘12척 백의종군’의 결기가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 권력자의 낙점과 감투 다툼에 찌든 45년 집권의 기득권 금단 증세일까. 0선(選) 후보 모셔 놓고 합계 수백 선인 전·현직 의원과 고관대작, 판·검사, 폴리페서 등 400명 넘는 간부들이 선대위에 또아리를 틀며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니···.

지금 한가롭게 지방선거와 재·보선, 집권 후 벼슬과 주도권의 김칫국 마실 때인가. 그러니 탄핵당하고 연패의 야당이 된 것 아닌가. 53%의 본질인 국정 쇄신의 대안과 비전을 한시도 망각해선 안 될 시간이다. 후보 부인의 경력 의혹 등 잘못은 스스로 다 들춰 진정성있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라. 여당보다 더욱 준엄하고 가혹할 역사적 책임의 심판대에 선 건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