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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이명박근혜와 문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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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차세현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김종인 위원장답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일 취임 후 첫 공식 회의에서 “정권 교체 열망이 있기 때문에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정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선거 캠페인을 앞두고 캠프에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말이리라.

그래도 민심의 흐름을 꿰뚫어온 선거의 고수답지 않은 표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열흘도 지나지 않아 윤석열 후보는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아내 김건희씨의 경력 부풀리기 의혹과 이후 대응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12년 정권 교체 여론 컸지만
여당 박근혜 후보, 108만표 승리
이재명, 문재인 정책 전부 뒤집기
윤석열, 아내 의혹 명쾌하게 해야

지난 17일 가족 관련 의혹으로 사과하는 윤석열 후보. [뉴시스]

지난 17일 가족 관련 의혹으로 사과하는 윤석열 후보. [뉴시스]

김씨 관련 의혹은 간단치 않은 사안이다. 검사 윤석열을 일약 야권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린 정치적 밑천을 탈탈 털 수 있는 일이다. 공정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윤 후보는 지난 17일 서둘러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날은 한국 갤럽이 발표한 대선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35%)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36%)에게 역전을 허용한 날이다. 얼마 전 지지율이 떨어지자 부랴부랴 울산으로 내려가 이준석 당 대표를 만나더니 또 한발 늦었다.

“경력 기재가 정확하지 않고 논란을 야기한 것 자체만으로도 제가 강조해온 공정과 상식에 맞지 않는다” 문제의식은 적확했다. 그런데 뭔가 빠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없다. 김씨가 경력을 부풀려 개인적으로 얻은 이익이 있다면 즉각 포기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 빠진 것이다.

“설마 이걸로 끝내진 않겠지요” 진중권 전 교수의 말은 ‘찐’ 민심이다. 지금 국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에게 들이댔던 검사 윤석열의 칼이 과연 어디로 향할지 지켜보고 있다.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고독한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를 주시하고 있다.

지난 16일 가족 관련 의혹으로 사과하는 이재명 후보. [뉴시스]

지난 16일 가족 관련 의혹으로 사과하는 이재명 후보. [뉴시스]

일각에서는 때마침 터진 이재명 후보 아들의 불법 도박과 성매매 의혹을 거론하면서 피장파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현재 이 후보에 대한 지지는 이 후보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상식 밖의 일들을 딛고 쌓아 올린 지지다. 냉정하게 말하면 아들 관련 사안은 (이 후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저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정권 교체 열망이 커서 정권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김 위원장의 진단도 절반은 틀리다. 오래전 얘기도 아니다. 딱 9년 전 18대 대선을 3개월 앞둔 2012년 9월, 한겨레신문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명박 정부 지지도가 20%대 중반인 상황에서 정권교체 여론이 56.7%, 정권 재창출 여론은 35.3%였다. 무려 20%가 넘는 차이였다.

대선을 10여일 앞둔 12월 같은 기관 조사에서도 52.5%대 39.9%였다. 그런데 대통령 당선인은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까지 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아니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였다. 108만표 차였다. 당시 김 위원장은 박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이었다.

다른 여러 요인이 있지만 민주당의 ‘이명박근혜(이명박+박근혜)’ 프레임은 먹히지 않았다. 국민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던 박근혜 후보의 당선도 정권 교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지금 비문(非文) 이재명 후보는 그 전략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명박 청와대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 청와대의 묵인 속에서 말이다.

방만한 선대위를 날렵하게 갈아치운 이 후보는 내로남불의 오명을 남긴 ‘조국의 강’을 건너고, 청와대가 자화자찬하던 K방역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자영업자 손실 보상에 앞장서고, 다주택자 중과세와 공시지가 현실화 유예 카드까지 꺼내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 전부 뒤집기에 나서고 있다. 굴욕적이라고 비판받아온 대북 유화정책을 실용외교로 갈아치우고, 전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에 발맞춰 탈원전 정책까지 철회한다면? 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 중에 뭐 하나 남아나는 게 없다. 그렇다면 국민은 이 후보 당선도 정권 교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야당의 문재인 때리기와 ‘문재명(문재인+이재명) 전략’은 9년 전처럼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최근 지지도 정체·하락 상황을 놓고 이준석 당 대표는 환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환장하는 건 김 위원장이 말한 정권 교체를 바라는 절반 이상의 국민일 거다. 후보 가족 일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참모들도 쉽게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후보 입만 바라본다. 하물며 로열티 약한 참모들로 급조된 매머드 윤석열 캠프랴. 오직 국민에게만 충성하겠다는 윤석열 후보에게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