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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50원 시위’가 바꾼 대권…학생운동 출신 35세 좌파 당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칠레의 좌파 연합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가 19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선거운동본부에서 당선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칠레의 좌파 연합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가 19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선거운동본부에서 당선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남미의 칠레에서 19일(현지시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 후보 가브리엘 보리치(35)가 당선됐다. 10년 전 학생 운동을 발판으로 정계에 데뷔한 보리치는 내년 3월 11일 만 36세에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1990년 칠레 민주화 이후 최연소 대통령이다.

미국 CNN 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투표 개표율 99.95% 상황에서 칠레 공산당이 포함된 좌파 연합을 이끈 보리치가 55.87%를 득표한 것으로 집계됐다. 44.13%를 기록한 보수 후보인 공화당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를 10%p 이상 따돌리며 당선을 확정 지었다. 카스트는 개표가 완료되기 전 트위터를 통해 “오늘부터 그가 대통령 당선인”이라며 승복했다.

보리치도 당선 수락 연설을 통해 “지금은 전세계와 칠레에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적 순간”이라며 “투표에 참가한 모든 칠레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그는 “(인간의)권리는 권리이며, 그것은 상품도, 산업이 아니다”고 발언했다.

보리치는 앞서 11월 치러진 1차 투표에선 약 25%를 얻어 28%의 카스트에게 밀렸다. 2위로 결선투표에 올라 전세를 뒤집었다.

1986년 2월생으로 ‘밀레니얼 세대’인 보리치는 대선 기간 “그간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그는 최저임금 인상과 대대적인 사적 연금 개편, 의료 시스템 정비, 국영 리튬 회사의 설립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보리치의 당선 배경에는 더 많은 공공 지출을 요구하는 젊은 도시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고 WSJ는 전했다. 이 같은 흐름은 지난 2019년 ‘50원 시위’로 촉발된 세바스티안 피네라 현 중도 우파 정부에 대한 반발 심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칠레의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를 지지하는 이들이 19일(현지시간) 결선투표 이후 보리치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칠레의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를 지지하는 이들이 19일(현지시간) 결선투표 이후 보리치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피네라 정부는 그해 10월 지하철 요금을 30페소(약 50원) 인상하겠다고 했다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에 직면해야 했다. 표면상 공공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 격차와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교육, 의료, 연금 등 사회 부문 전반에 걸친 개혁 요구로 이어졌다. 영국 BBC에 따르면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해 왔던 칠레는 인구의 1%가 전체 부의 25%를 소유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소득 양극화에 직면해 있다.

이 시위로 탄핵 위기까지 몰렸던 피네라 대통령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1973~1990년) 때인 1980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의 전면 개정 카드를 띄워 돌파구를 모색했다. 올 상반기 새 헌법을 위한 제헌의회가 선출됨에 따라 보리치는 내년 7월까지 새 헌법안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국민투표까지 안정적으로 치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번 칠레 대선에서 양대 후보는 세대·이념·가치관이 양극단에 가까울 만큼 달랐다. 청년 정치인인 보리치는 2011년 칠레의 고등교육 개혁을 위한 대규모 학생 시위를 이끈 인물이다. 이후 하원의원을 거쳐 칠레의 대선 출마 가능 연령인 35세에 대선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그가 남미 신세대 좌파의 전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보리치는 기후변화 문제에 민감하고, 여성ㆍ원주민과 성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밝혀왔다. 스스로 “강박장애가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지난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로이터=연합뉴스]

반면 우파 후보 카스트는 독일 가톨릭 이민자의 아들로, 9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카스트는 시장 경제를 철저히 옹호하고, 이민자의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한 장벽 건설, 임신 중절의 전면 금지, 여성부의 명칭 폐기 등의 정책을 앞세웠다. 친형이 과거 군부 독재자였던 피노체트 정권에서 각료를 지낸 인물로, 그 자신도 피노체트를 지지했다. 선거 과정에서 아버지가 나치 부역자였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거침 없는 언행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또는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과 비교 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보리치 정권은 1990년 칠레 민주화 이후 집권한 미첼 바첼레트 사회당 정부와 같은 온건 좌파보다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 블룸버그 통신·WSJ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살바도르 아옌데(1970~73년) 대통령 이후 반세기 만에 가장 좌파 성향이 강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봤다. 70년대 초반 아옌데 대통령은 주요 산업 국유화, 토지 몰수 정책 등 대대적인 좌파 정책을 펼쳤다. 이후 보수 성향 군 장교 출신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피노체트 정권의 17년 장기 집권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의 정권 교체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우려를 살 수 있다고 WSJ는 짚었다. 보리치는 당선 직후 칠레의 25억 달러 상당(약 2조 9700억원) 초대형 광산 프로젝트인 ‘도밍가 철ㆍ구리 채굴 계획’에 대해 “환경 파괴”를 이유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올해 들어 칠레 화폐 페소의 가치는 16% 하락하는 등 경기도 불안정한 흐름을 보여왔다.

칠레의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 [AP=연합뉴스]

칠레의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35). [AP=연합뉴스]

반면 보리치의 행보로 볼 때 극단적인 정책을 실제로 추구하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보리치는 2019년 ‘50원 시위’ 이후 평화적인 질서 회복을 위해 피네라 우파 정부가 띄운 개헌 논의에 힘을 실어줬다. 또 중남미의 좌파 독재 정권인 베네수엘라·니카라과와는 거리를 두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치 컨설턴트 에우헤니오 티로니 산티아고 가톨릭대 교수는 WSJ에 “보리치는 이념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협의를 구성하고 협상을 위한 동맹을 조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최근 3년 간 멕시코ㆍ아르헨티나ㆍ페루에 이어 칠레까지 중남미 국가들에서 잇따라 좌파 정부가 들어서며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한 사회주의 물결)’의 부활을 내다보는 이들도 있다. 브라질 역시 내년 대선에서 좌파계 대부인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의 복귀가 임박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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