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조정안, 한 달 뒤면 윤곽…"고차 방정식" 남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1.12.20 16:18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판매기업 처벌 촉구' 기자회견에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판매기업 처벌 촉구' 기자회견에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10년 넘게 끈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사회적 합의로 해결될 수 있을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조정위원회가 반환점을 돌면서 한 달 뒤 조정안의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다만 피해자·기업 등의 입장이 다양한 편이라 최종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10월 초 공식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는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사적 협의 기구(사무국 법무법인 한결)다. 2011년 8월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역학조사 발표 이후 약 10년 만에 구성된 협의체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위원장으로 위촉됐고, 각계 전문가 4명이 조정위원을 맡았다. 20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 업체 9곳과 피해자 단체 12곳 등이 참여하고 있다. 다만 참여 주체는 향후 조정안에 따라 추가될 수 있다.

조정위는 두 달여에 걸쳐 피해자ㆍ기업 양측이 각각 참여한 조정 기일 등을 거의 마무리했다. 당사자 의견 청취를 마친 만큼 향후 한 달간 조정안 만드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정위 사무국장인 안식 법무법인 한결 대표변호사는 "1월 중ㆍ하순이면 조정안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본다. 아직까진 별 잡음 없이 (조정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8월 3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기업의 합의 사항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8월 3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기업의 합의 사항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피해자와 기업 측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특히 오랜 기간 사태 해결을 위해 뛰어온 피해자와 시민단체 등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다. 시민단체 연대 조직인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의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어렵게 만들어진 조정위이다 보니 피해자들은 걱정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일단 결과를 보자는 기대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조정액과 조정 비율, 대상 등을 정해야 하는 남은 한 달이 최대 고비다. 안식 사무국장은 "기업과 피해자 모두 수용해야 하는 부분이 제일 큰 과제다. 워낙 각자의 입장이 다양하다 보니 고차 방정식을 푸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기존 사회적 조정 사례인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과 비교하면 이번 건은 까다로운 편으로 꼽힌다. 당시엔 한 회사에서 발생한 일이고 피해자 수도 비교적 적었지만, 이번엔 피해자ㆍ기업 등이 서로 얽혀 복잡한 구도를 보인다. 이 때문에 조정위 측에선 삼성 반도체 백혈병 조정위원장을 맡았던 김지형 전 대법관 등의 조언도 구했다고 한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놓인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 편광현 기자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놓인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 편광현 기자

피해자 측은 현재 주요 단체 중심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추후 조정안이 만들어지면 개별 피해자 7600여명(지난달 말 정부 피해 구제 신청자 기준)에게 수차례 설명회가 열리고 동의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그런데 조정안 쟁점 사항을 두고 목소리가 조금씩 나뉘는 편이다. 생존 여부와 살균제 노출 당시 연령, 그로 인해 발생한 구체적 질환 등 피해 양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29명이 참석한 2차 피해자 조정 기일(8일) 회의록에 따르면 피해 당시 연령을 고려해 조정 금액을 정하는 부분에 있어선 "나이가 어릴수록 근로기간이 길다" "영유아는 피해를 감내하며 살아야 할 기간이 길다" 등의 찬성 의견이 많았다. 반면 "피해 정도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식의 반대 의견도 나왔다.

질환 종류, 피해 중증도에 따른 조정액 차등도 찬반이 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살균제 아이들 피해자 단체는 '피해자 중증도로 예단하는 건 금물이며, 억울함 없는 연령 반영 기준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환경부도 가해 당사자로 조정위에 참여해야 한다'(한국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협의회)는 강력한 요구 등도 제시됐다.

반면 조정에 응한 기업들은 비교적 입장이 균질한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가장 민감한 각 사별 조정 금액 분담 비율 등은 조정위 쪽에 결정을 위임했다. 피해자 측과 달리 조정 기일에 논의한 내용도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10월 5일 공식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에 참여한 조정위원들과 김이수 조정위원장(가운데). 사진 법무법인 한결

10월 5일 공식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에 참여한 조정위원들과 김이수 조정위원장(가운데). 사진 법무법인 한결

향후 조정 논의에선 올해 초 1심서 '무죄'를 받은 SK케미칼ㆍ애경산업 관계자에 대한 항소심 결과가 주요 변수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진행 중인 항소심 선고는 내년 상반기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3월 열리는 대통령 선거 결과도 조정 당사자들의 주된 관심사다.

최예용 소장은 "가해 기업에 형사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올지가 의문인 데다 곧 대선도 있기 때문에, 피해자 사이에선 빨리 조정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라면서 "돈이나 법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조정위가 역할을 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식 사무국장은 "판결이 조정 결과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다. 기업도 법원 판결로 현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 같진 않다"면서 "조정위원들이 양측에서 수용할 수준이 어딘지 고민해서 잘 판단할 거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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