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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과하지 않았다…칠레 독재자 피노체트를 만든 여인

중앙일보

입력

1998년 3월 10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오른쪽) 전 대통령과 함께 군 행사에 참석한 루시아 히리아트. 16일(현지시간) 향년 99세로 숨졌다. AFP=연합뉴스

1998년 3월 10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오른쪽) 전 대통령과 함께 군 행사에 참석한 루시아 히리아트. 16일(현지시간) 향년 99세로 숨졌다. AFP=연합뉴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의 부인 루시아 히리아트가 16일(현지시간) 숨졌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19일 보도했다. 99세. 히리아트는 올 초 호흡기 질환으로 입원한 뒤 투병한 끝에 산티아고의 아파트에서 숨졌다고 아들 마르코 안토니오 피노체트가 밝혔다. 히리아트는 20세기 칠레에서 대표적인 논란의 인물로, 이날 산티아고 광장에선 시민 수백명이 모여 하리아트의 사망을 반겼다.

피노체트에 쿠데타 부추긴 아내 

2005년 9월 1일 루시아 히리아트가 산티아고 카스트란데 성당에서 피노체트가의 지지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했다. EPA=연합뉴스

2005년 9월 1일 루시아 히리아트가 산티아고 카스트란데 성당에서 피노체트가의 지지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했다. EPA=연합뉴스

히리아트는 “독재자 피노체트를 만든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피노체트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쿠데타 전날 밤 상황은 이랬다. “그날 밤 히리아트는 나를 손주들이 자는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선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아이들은 노예가 될 거예요. 당신이 (쿠데타를) 결단하지 못했으니까요.’” 히리아트가 쿠데타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쿠데타 이후 4대 기관장(육ㆍ해ㆍ공군, 경찰)이 돌아가면서 통치하기로 합의했을 때 피노체트를 첫 집권자로 밀어붙인 것도 히리아트였다.

피노체트 사령관은 결국 1973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내고 민주화가 이뤄진 1990년까지 17년간 독재자로 군림했다. 당시 수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금돼 고문당했고 3000여명이 집단 학살 등으로 살해됐다. 추방당한 이들만 수만 명에 이른다. 대통령궁에서 히리아트의 권력은 남편 못지않았다. 남편의 공직 임명권에 끊임없이 관여해 영향을 끼쳤고, 장관 해고도 제멋대로 했다고 한다. “70~80년대 칠레의 왕비”라는 평가가 나온다. 피노체트가 실각 위기에 처하자 지지자들은 히리아트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려고도 했다.

장관의 딸, 집안 반대에도 군인과 결혼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미망인 루시아 히리아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16일(현지시간) 산티아고 광장에서 시위대가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미망인 루시아 히리아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16일(현지시간) 산티아고 광장에서 시위대가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히리아트는 1940년대 칠레 내무장관을 지낸 오스발도 히리아트의 장녀로, 1943년 7살 연상의 육군 장교 피노체트와 결혼했다. 히리아트 집안에선 피노체트 집안이 중산층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사치와 부패로도 악명 높다. 1400만 달러(약 166억5500만원)를 들여 산티아고가 한눈에 보이는 안데스 산기슭에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지하 벙커를 갖춘 저택을 지었지만, 여론에 막혀 직접 살진 못했다.

그는 2016년까지 정치적 기반이었던 자선단체 드 마드레스 칠레(CEMA)를 이끌었다. 이 재단의 기금은 피노체트 90년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생활비 등으로 쓴 것으로 드러났다. 재단은 2019년 운영을 중단하면서 76억 페소(약 1811억원) 상당의 부동산 108곳을 정부에 압류당했다. 또 과거 집권 시절 무기 밀반출 등 공금을 횡령해 워싱턴의 릭스 은행에 차명계좌 125개를 통해 보관하고 있던 비자금의 실체가 지난 2005년 드러나기도 했다. 이들 가족의 탈세 규모만 2100만 달러에 달했지만, 처벌은 면했다.

그는 피노체트가 2006년 숨진 뒤론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지냈다. 2015년 두 아들, 세 딸과 함께 남편의 추모 미사에 참석한 게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히리아트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끝내 피해자들에게 사과 한 마디 없이 마지막 길을 떠났다. 19일 칠레 대통령에 당선된 가브리엘 보리치는 “하리아트는 칠레를 깊은 고통과 분열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죽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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