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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코로나 패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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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21일 KBS1 TV에서 ‘국민과의 대화’ 이벤트를 열었다. 스튜디오 현장에 시민을 200명이나 초청했다. 대선을 100여일 남겨 놓은 민감한 시점인데 대통령이 TV에 나와 그런 대형 행사를 하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왜 저런 이벤트를 하나 궁금했는데 대화의 주제가 ‘코로나 방역’이란 얘기를 듣고 이해가 갔다. 11월 1일부터 시작한 ‘위드 코로나’(방역 단계적 완화조치)를 홍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패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중앙일보 김성룡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패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중앙일보 김성룡 기자]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일상회복이 된 덕분에 오랫동안 국민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오늘 이런 기회를 갖게 돼서 아주 기쁘다”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 그는 “조금 조마조마한 부분이 있다. 확진자 수가 5일째 3000명을 넘고 있다”면서도 “사실 확진자 수 증가는 단계적 일상회복에 들어갈 때 미리 예상했던 수치다. 정부는 5000명 또는 1만 명 정도까지도 확진자 수가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대비를 했다”고 장담했다.

문 대통령의 호언대로 상황이 잘 돌아갔으면 홍보쇼가 나름대로 의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에 관한 한 문 대통령이 잘될 거라고 하면 항상 거꾸로 가는 법칙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국민과의 대화’ 같은 대형 이벤트를 준비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행사 기획 단계 때는 코로나 확진자 수가 수천 명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확진자 수가 폭증하자 내심 청와대도 당황했겠지만 설마 큰일이야 있겠냐는 판단으로 홍보쇼를 밀어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19 주간 현황(확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코로나 19 주간 현황(확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문 대통령은 지난 16일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단계적 일상회복 과정에서 중증 환자의 증가를 억제하지 못했고 병상 확보 등의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다”며 “방역조치를 다시 강화하게 돼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숙였다. 폼나는 홍보쇼는 본인이 직접 나서지만 대국민사과 발표는 대변인의 몫이다. 최근 확진자 수가 급증하자 방역 당국과 의료계는 방역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계속 건의했지만 문 대통령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심지어 박 대변인이 사과 발표를 한 날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전달된 문 대통령의 신년 연하장에는 “마스크와 함께하는 생활이 두 해나 이어졌지만 국민 여러분의 협조 덕에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는 희망의 계단에 올랐다”고 쓰여 있었다. 연하장이 정부의 거리두기 강화 발표 이전에 인쇄돼 생긴 해프닝인데, 문 대통령이 막판까지 얼마나 방역 강화를 꺼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이 방역 강화를 거부한 건 자신의 임기 중에 반드시 ‘일상회복’을 달성하겠다는 의욕 과잉이었던 건지, 자영업자 민심 악화로 대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경위야 어떻든 터무니없는 판단 착오였던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이미 11월 21일 시점에 홍보쇼는 걷어치우고 방역 강화 조치를 적극 검토하는 게 옳았다. 그랬으면 적어도 수백 명의 목숨을 구했을지 모른다. 물론 문 대통령 본인이 의료 전문가는 아니다. 의료계가 “이런 식으론 못 버틴다”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어 작금의 코로나 패닉을 유발한 것은 누가 뭐래도 청와대 기모란 방역기획관과 이진석 국정상황실장의 책임이 크다.

지난해 5월20일 기모란 국립암센터 교수(오른쪽, 현 청와대 방역기획관)가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미국의 모더나 백신은 불안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지난해 5월20일 기모란 국립암센터 교수(오른쪽, 현 청와대 방역기획관)가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미국의 모더나 백신은 불안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청와대는 지난 4월 방역기획관을 신설하면서 “최고의 방역 전문가”라며 기 기획관을 영입했지만 그동안 거둔 실적이 도대체 뭐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 실장은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으로 기소까지 됐지만 청와대는 “코로나 상황에서 의사 출신 이 실장의 역할이 막중하다”며 보호해 왔다. 참모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잘 안 바꾸기로 유명한 문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번 ‘위드 코로나’ 유턴 같은 국정 대참사에도 아무도 책임을 안 진다면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어떤 방역 정책을 펴도 국민의 신뢰를 되찾긴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