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걸린건 내탓" 환자 자책에 신념 꺾었다…턱수염 의사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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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훈 교수는 지난해 6월부터 유튜브 채널 CK(Cancer Killer) Project 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진료실 또는 자택에서 촬영한다고 한다. 사진 본인제공

성기훈 교수는 지난해 6월부터 유튜브 채널 CK(Cancer Killer) Project 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진료실 또는 자택에서 촬영한다고 한다. 사진 본인제공

“학창시절 시험 중간마다 서로 답을 맞히곤 하잖아요.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턱수염을 기른 채 하얀 가운을 입은 교수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지난해 여름 뜻밖의 도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10년 차 의사인 그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내 잘못 때문에 병이 왔다’고 자책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암과의 싸움에선 자신이 뭘 잘못 했는지 따지기보단 ‘치료’에 집중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사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너지는 환자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유방암은 무엇을 해서, 혹은 안 해서 걸리는 병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인터넷에서 가짜 의학 정보와 속설을 접한 환자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유튜버가 돼 온라인에 가득한 잘못된 의학 정보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했다. 직접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까지 도맡는 2년 차 유튜버, 성기훈(48) 가천대 길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얘기다.

33살 늦깎이 의대생에 닥친 시련

성기훈 교수는 과거 영상, 음향 편집 관련 파트타임 경험을 살려 유튜브 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고 있다. 사진 본인 제공

성기훈 교수는 과거 영상, 음향 편집 관련 파트타임 경험을 살려 유튜브 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고 있다. 사진 본인 제공

의사는 성 교수의 첫 직업이 아니다. 지질학을 전공한 뒤 원자력연구원으로 향했던 그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원자로만 바라보는 일상에 지쳐가던 어느 날 어릴 적 일기에 적은 소망이 떠올랐다고 한다. 신경외과 의사인 아버지처럼 ‘세상의 아픔을 덜어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마침 의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길이 열렸고 33살 청년은 그렇게 새 출발점에 섰다.

늦깎이 의대생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밤낮으로 책과 씨름하던 2007년, 아내가 육종암 4기 판정을 받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뼈, 근육, 연골 등 근골계에 생기는 암이었다. 2년 차 의대생은 의사보다 보호자 생활을 먼저 하게 됐다. 도서관이 아닌 병실에 머무는 날이 늘었고 외과 의사라는 꿈을 결국 접었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방사선종양학과로 진로를 틀었다. 방사선 종양학과는 모든 일이 하루 단위로 끝나 늦은 시간이라도 퇴근할 수 있어서다. 개업이 어렵고 생소한 분야라는 세간의 평은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 교수는 돌이켜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진료를 할 수 있다 보니 환자와 소통할 기회가 늘었다는 점에서다. 많은 환자와 깊은 대화를 하고 싶었던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과거 결정학을 공부하고 원자력 연구원에서 일했던 덕에 방사선 진료와 치료에 적응이 빨랐다. 10년간 아내의 보호자였던 시간은 그가 암 환자의 심리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환자 위해 꺾은 신념 

기타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성 교수는 종종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연주영상을 업로드 한다. 사진 본인제공

기타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성 교수는 종종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연주영상을 업로드 한다. 사진 본인제공

환자와의 소통을 우선하는 태도는 결국 그를 유튜버로 이끌었다. 성 교수는 원래 의사들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하는데 부정적이었다. 역기능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의학 정보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교수님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이 들어야 한다”는 환자들의 말에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두 달간 의학 관련 유튜브 채널을 돌려보고 모니터링했다. 자극적이거나 사실을 과장하는 콘텐트를 피하면서 환자들에게 정확한 의학 정보를 전해야 한다는 다짐에서다.

‘랜선 진료실 체험관’은 그의 마음가짐이 녹아든 대표적 유튜브 콘텐트다. 환자와의 진료 장면을 녹화한 뒤 편집해 올리는 영상이다. 환자의 얼굴 등 신상정보는 가렸다. “환자들은 진료실에서 어떤 치료를 받는지 제일 궁금해한다. 가장 궁금한 부분을 보여줘서 환자가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돕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최근 성 교수는 부쩍 유명세를 탔다고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서다. 그는 “요즘 성기훈을 검색하면 이정재 배우 얼굴만 나온다”며 “유튜버 입장에선 손해가 막심하다”고 웃었다. 유익한 콘텐트를 더 많이 만들어 또 다른 ‘성기훈’을 넘어서겠다는 게 그의 새로운 목표다.

본업에 유튜브 콘텐트 제작까지 바쁜 일상이지만, 성 교수는 힘이 닿는 한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방사선 종양학은 의료 봉사가 어려워요. 봉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숙제 안 한 학생처럼 주눅 들곤 했어요. 유튜버가 되고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쓸어내릴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도 가짜 의학 정보를 바로잡고 도움이 간절한 분들에게 힘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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