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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 앞머리를 한땀한땀...30cm 머리카락이 만든 기적

중앙일보

입력

“가발을 만들 때 앞머리는 걸그룹 트와이스처럼 해주세요.”
‘어머나 운동본부’에 간혹 접수되는 요청 사항이다. 김영배 이사장은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아암 환자 친구들이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시기다 보니 이런 세심한 제작 요청들이 들어올 때도 있다”며 웃었다. ‘어머나’는 ‘어린 암 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을 줄인 말이다.

2008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항암 치료로 탈모가 심한 소아암 환자를 위해 어린이용 가발을 만들어 기부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머리카락 기부처다.

가발 하나에 200여명의 모발 필요…하나하나 수작업

소아암 환자의 가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200여명의 모발기부가 필요하다고 한다. 10만 가닥의 머리카락이 모여야 하나의 온전한 가발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수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월평균 6~7개 정도의 가발이 제작돼 소아암 환자들에게 전달된다.

6명의 어머나 운동본부의 직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배송된 기부 모발을 분류하는 작업을 거친다. 길이별로, 손상도 정도에 따라 머리카락을 나눈 뒤 가발공장으로 보낸다. 가발 공장에 기부 모발이 도착하면 작업자들은 큐티클 제거작업에 들어간다. 제각기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들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끔 하는 작업이다. 이후에 다시 전체 머리카락을 염색해 색을 균일하게 맞춘다. 10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수작업으로 심어야 하기 때문에 한 명의 작업자가 하나의 가발을 만드는 데에만 최소 20일이 걸린다고 한다.

“3년 기른 머리 단발되어도 뿌듯”

12월 유지희(34)씨가 어머나운동본부에 기부하기위해 자른 머리카락의 모습. 40cm가 넘는 길이의 머리카락을 기부했다. [유씨 제공]

12월 유지희(34)씨가 어머나운동본부에 기부하기위해 자른 머리카락의 모습. 40cm가 넘는 길이의 머리카락을 기부했다. [유씨 제공]

최근 유지희(34)씨는 40cm가 넘는 머리카락을 잘라 어머나 운동본부에 기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우연한 계기가 됐다. 유씨는 “코로나19로 미용실에 자주 가지 못해 머리카락이 길었고, 염색도 하지 않은 상태라 ‘길어서 잘라 버리기엔 아까운데 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잘린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챙겨서 뿌듯해하며 미용실을 나섰다. 잘린 머리카락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기부한다는 설렘이 더 커서 또다시 모발기부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로 아이들의 항암치료 부작용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치료의 아픈 기억도 잘 덮어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11월 어머나운동본부에 30cm가 넘는 머리카락을 기부한 뒤 단발 머리가 된 현상연씨의 모습. 3년간 유지했던 장발을 모발기부를 위해 잘랐다. [현씨 제공]

지난 11월 어머나운동본부에 30cm가 넘는 머리카락을 기부한 뒤 단발 머리가 된 현상연씨의 모습. 3년간 유지했던 장발을 모발기부를 위해 잘랐다. [현씨 제공]

현상연(26)씨도 버킷리스트로 담아뒀던 모발기부에 지난달 참여하게 됐다. 현씨는 30cm가량의 머리카락을 어머나 운동본부에 기부했다. 현씨는 “모발기부가 가장 쉽고 빠르게 실행할 수 있는 기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씨는 “3년 동안 장발로 살았는데 갑작스레 단발이 된 내 모습이 어색해 가장 먼저  ‘내일 회사 어떻게 가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며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금방 잊을 정도로 정말 뿌듯했고 주변에 저처럼 기부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창 꾸미기 좋아할 시기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많을 것 같다. 가발을 받는 아이에게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너에겐 그 순간이 좀 일찍 찾아온 것뿐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더 당당해지고 본인을 더 많이 사랑해주라’고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발 많이 만들진 못하지만…

어머나 운동본부로 접수된 기부자들이 소아암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어머나운동본부 제공]

어머나 운동본부로 접수된 기부자들이 소아암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어머나운동본부 제공]

어머나 운동본부에는 이런 기부자 5000여 명의 머리카락이 달마다 배송된다. 어찌 보면 제작과정이 ‘비효율적’이지만 어머나는 이 기부사업을 13년간 이어왔다. 김영배 이사장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수작업을 해야 하는 특성상 가발도 많이 만들지 못해 사실 번거롭고 비효율적이지만, 우리는 이 기부를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든 자라는 머리카락을 기부한다는 의미가 기부자들에게 기부의 기쁨과 시작을 맛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며 “누구든 기부를 할 수 있고 기부가 어렵지 않다는 걸 경험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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