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보다 서울’…일본 제친 ‘고급 한국’ 100년 넘게 펼쳐진다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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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윌리엄 밴더빌트는 뉴욕 한복판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 당대 최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꾸민 내부는 붉은 서까래가 달린 대나무 천장과 자개로 만든 나비가 그려진 벽, 옻칠한 장롱과 도자기 등…명백한 ‘일본풍’이었다.

미국의 백만장자 윌리엄 H.밴더빌트 저택의 일본풍 응접실. 사진 중앙포토

미국의 백만장자 윌리엄 H.밴더빌트 저택의 일본풍 응접실. 사진 중앙포토

같은 시기 프랑스에선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가 그려진 부채가 패션·인테리어 소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일본의 향기’란 향수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런던 하이드파크엔 ‘일본 마을’이란 찻집이 들어섰고, 기모노를 입고 파티를 하거나 일본식 양산을 들고 거리를 거니는 게 큰 유행이었다. 19세기 서양은 요새 말로 J패션, J스타일 등 ‘일류(日流)’에 열광했다. 그 후 100년이 훌쩍 넘도록 일본 문화는 패션과 디자인은 물론 미술·문학·클래식·대중가요·만화·애니메이션·문학 등 세계적으로 ‘고급문화’의 지위를 누렸다.

1886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 나이츠브리지에 세워진 '일본 마을' 찻집. 사진 위키피디아

1886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 나이츠브리지에 세워진 '일본 마을' 찻집. 사진 위키피디아

2021년.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심이던 ‘한류’가 북미와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윤여정 배우가 백인들의 잔치라고 비판받아온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세계 차트 1위에 올랐다. 빌보드 인기곡 차트에서 10주 동안 1위를 차지한 BTS(방탄소년단)의 최근 미국 콘서트에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무려 21만3000여명이 물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2년 만의 대면 콘서트를 개최한 그룹 BTS(방탄소년단)가 2일(현지시간) 공연을 끝으로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사진 빅히트 뮤직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2년 만의 대면 콘서트를 개최한 그룹 BTS(방탄소년단)가 2일(현지시간) 공연을 끝으로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사진 빅히트 뮤직

고급문화, 고부가가치 산업의 정점으로 불리는 패션에선 어떨까. 프랑스·이탈리아 등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이 국내나 아시아가 아닌 브랜드 전체를 대표하는 글로벌 홍보대사(앰배서더)로 한국 스타를 내세우고 있는 게 많은 걸 말해준다. 올해 들어서만 디올과 티파니앤코가 각각 블랙핑크의 지수와 로제를, 루이비통이 BTS를, 살바토레페라가모가 레드벨벳 슬기를, 로에베는 현아를 글로벌 홍보대사로 선정했다.

자라와 아더에러의 'AZ 컬렉션' 사진 자라

자라와 아더에러의 'AZ 컬렉션' 사진 자라

국내 브랜드를 찾는 이도 부쩍 늘었다. 최근 스페인의 ‘자라’가 국내 브랜드 ‘아더에러’와 협업한 의상으로 히트를 쳤고 세계 1위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가수 지드래곤과 벌써 세 번째 운동화를 내놨다. 루이비통의 디자이너였던 버질 아블로가 만든 ‘오프화이트’는 아모레퍼시픽과 손잡아 화제가 됐다.

세계적인 패션 저널리스트이자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인 수지 멘키스는 2015년 “서울은 아시아 리딩 도시가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의 원천이 될 때가 됐다”고 했는데 그 말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일 나이키와 지드래곤의 협업 운동화 '나이키 퀀도1'이 공식 발매됐다. 사진 나이키

지난 3일 나이키와 지드래곤의 협업 운동화 '나이키 퀀도1'이 공식 발매됐다. 사진 나이키

실제 아시아 하면 늘 도쿄가 최우선이었던 명품들이 이제는 서울을 먼저 찾고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패션 시계를 태양으로 표현하면 상하이가 아침 10시, 서울이 정오, 도쿄가 저녁 3시”라고 표현했다. 윤여정 배우는 수상 소감으로 “운이 좋았다”고 겸손해했지만 지금의 한국 문화 열풍은 결코 운이 아니다.

어느 나라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고급스럽다’ ‘멋지다’는 이미지로 자리 잡으려면 콘텐트 자체의 우수성만으론 한계가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무대에 알려지고 좋든 싫든 글로벌 헤게모니를 쥔 서구권이 주도하는 ‘클래식 문화’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경제력을 앞세워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꾸준히 내공을 쌓으며 이런 조건들을 채워왔다. 불굴의 제조 기업들이 우수한 품질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알렸고 아시안게임·올림픽·월드컵 등 세계인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독일 최고 발레단의 최정상에 선 강수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전 세계에 황홀경을 선사한 김연아 등은 서구 선진국들이 우월감을 갖던 분야를 제패했다.

100% 디지털 패션쇼로 열린 '2022 S/S(봄/여름) 서울패션위크'가 한달 만에 세계 160개국에서 7443만 뷰(지난 11월8일 기준)를 달성해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 관람자의 약 60%가 해외에서 유입됐다. 사진 서울시

100% 디지털 패션쇼로 열린 '2022 S/S(봄/여름) 서울패션위크'가 한달 만에 세계 160개국에서 7443만 뷰(지난 11월8일 기준)를 달성해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 관람자의 약 60%가 해외에서 유입됐다. 사진 서울시

경제적으로도 아시아 맹주였던 일본과의 차이를 좁히거나 앞서기 시작했다.

일례로 주식 시가총액 세계 100대 기업 중 한국 1위인 삼성전자는 14위, 일본 1위인 도요타자동차는 36위다. 올해 S&P등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이 평가한 신용등급도 한국이 일본보다 2단계 높다. 물가와 환율 수준을 반영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 역시 2018년 한국(4만3001달러)이 일본(4만2725달러)을 추월한 이후 이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석학 노구치 유키오 교수가 지난 12일 기고문을 통해 “G7에서 일본을 빼고 한국을 넣자고 해도 할 말이 없다”고 지적한 게 이런 배경이다.

일본 문화는 1850년대 문호를 개방한 뒤 30여년 만에 만국 박람회 등 국제 행사 등을 거쳐 세계적인 고급문화로 자리 잡아 저력을 이어왔다. 한국도 1986년 아시안게임 이후 30여년 만에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열풍’을 만들어 냈다. 같은 식이라면 한국 문화는 지금부터 2100년대 이후까지 쭉 세계를 매료시킬 고급문화로 뻗어가고 자녀들은 높아진 국가의 위상을 부모세대보다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한 해의 끝자락, 어두운 코로나 시국에 보이는 밝은 빛은 그래서 더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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