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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인가"…아빠 화장때 나온 작은 구슬에 빵 터진 사연 [더오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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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현정의 부암동 라이프(4)

나의 친가는 영적인 것을 많이 찾아다녔다. 여러 종교를 믿었던 친가는 불교에 정착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고모들을 따라 절에 다녔다. 주말이면 전국에 있는 절을 찾아다니는 것이 우리 가족의 여행이었다. 명절이 되면 스님에게 절을 하고 용돈도 받았다. 고모 4명과 아빠가 다니는 절은 다 달랐고 마음을 두고 만나는 스님들도 다 달랐다. 덕분에 내 용돈은 두둑했다.

아빠는 얼마 남지 않는 생을 두고 작은 암자에 방을 하나 받아 조용히 수행을 시작했다. 사람 한 명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에 책상과 옷가지, 이불이 전부인 살림살이였다. [사진 불교문화사업단]

아빠는 얼마 남지 않는 생을 두고 작은 암자에 방을 하나 받아 조용히 수행을 시작했다. 사람 한 명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에 책상과 옷가지, 이불이 전부인 살림살이였다. [사진 불교문화사업단]

내가 6살 되던 해, 아빠는 장이 파열되는 사고를 당하고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의사는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를 끌어안고 울었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아빠가 얼마 남지 않는 생을 두고 선택했던 삶은 평소 마음을 뒀던 절에 들어가 조용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작은 암자에 방을 하나 받아 들것에 실려 들어갔다.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거동은 불편했던 것 같다. 우리는 자주 아빠를 만나러 절에 갔다.

사람 한 명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방에 책상과 옷가지, 이불이 다인 살림살이였다. 어렴풋한 기억에 아빠는 책을 읽거나 기도를 했다. 몸이 나아져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법당에서 절을 하거나 주변을 산책했다. 주지 스님에게 용돈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 가끔 또래 동자승이 놀러 오면 같이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던 것도 생각이 난다. 2년을 넘게 절에서 지냈던 아빠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해 나왔다.

우리 가족은 그 뒤에도 주지스님이 죽는 날까지 그 절에 자주 갔다. 주지스님은 90이 넘어 입적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치매를 앓았다. 우리가 잠깐잠깐 뵙기에는 치매라기보다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며 자연히 기억이 소멸되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평생을 해온 새벽 기도만큼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는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했지만 스님은 먹지 못했다. 몸의 기억은 참 무섭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은 기억이 사라져 가는 순간에도 세포 세포에 저장되어 있듯 그렇게 살아있다. 죽는 날까지 새벽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빠를 화장할 때였다. 장의사가 화장한 뒤 우리에게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몇 개 줬다. 순간 우리는 ‘사리인가’ 했다. 갑자기 뒤편에서 지켜보던 아빠 친구 한 분이 “아이고, 덕아(아빠 이름이 인덕이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절에 다니더니 사리가 나왔구나” 연신 사진을 찍고, 불교계에 전화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난리가 났다. 나도 한술 더 떠서 “아빠 몸에서 사리가 나오다니” 하며 펑펑 울었다. 한참을 소란을 피우다 장의사에게 “사리가 맞나요?”하고 물어봤다. 화장터를 청소하던 장의사는 “고인이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입니다”하고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답을 해줬다.

장의사가 화장 한 뒤 우리에게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몇 개 줬다. 사리인가 했지만, 생전에 아빠가 늘 하고 있던 염주였다. 덕분에 슬픔이 가득한 화장터에서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pixabay]

장의사가 화장 한 뒤 우리에게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몇 개 줬다. 사리인가 했지만, 생전에 아빠가 늘 하고 있던 염주였다. 덕분에 슬픔이 가득한 화장터에서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pixabay]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이내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애초에 그럴 것 같았다고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다들 흥분해 있어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아빠는 늘 손목에 염주를 하고 있었고, 염을 할 때도 평소 차고 있었던 염주를 그냥 뒀었다. 우리 모두 염주를 그냥 뒀던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연신 사진을 찍으며 ‘덕아’하고 이름을 불렀던 뚱보 아저씨(내가 부르던 별명)는 “네가 마지막까지 큰 웃음을 주는구나”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치 아빠가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

우리 가족은 모이면 어김없이 사리 사건을 이야기한다. 숙연하고 슬픔이 가득한 화장터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아빠를 떠나보낸 슬픔에 아직은 서로가 짠하다. 꿈에서라도 아빠를 보고 싶었지만 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엄마는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라며 아빠가 좋은 곳으로 가서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명상도 하며 쫓아다녔지만 여전히 난 아빠가 어디를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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