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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인조는 오군, 최명길은 간신으로 본 ‘오랑캐’ 이데올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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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조선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의 ‘청나라 병사 그림(胡兵圖)’. 청나라 병사 두 명을 실제보다 나이 들게 그리며 희화화한 느낌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의 ‘청나라 병사 그림(胡兵圖)’. 청나라 병사 두 명을 실제보다 나이 들게 그리며 희화화한 느낌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신이 생각하기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오랑캐의 성품은 몹시 탐욕스러운데 피난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절대로 침탈하지 않고 또 그들의 대오(隊伍)도 아주 정제돼 있습니다. 전마(戰馬)는 멀리서 왔음에도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으니 몹시 괴이쩍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건대 흉악하고 간특함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나라 군대 정돈된 모습에 충격

조선 조정이 병자호란을 맞아 포위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1636년 12월 15일, 호조참판 윤휘(尹暉·1571~1644)가 인조에게 아뢰었던 내용이다. 당시 윤휘는 왕명을 받고 한양에 잠입하여 상황을 살핀 뒤 산성으로 막 귀환한 참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윤휘가 청군 행렬을 목격한 뒤 몹시 당황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평소 인식대로라면 ‘청군은 탐욕스러운 오랑캐이기에 조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고 대오 또한 흐트러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청군은 조선 피난민의 물건을 빼앗지도 않고, 대오 또한 정제돼 있었다. 윤휘는 청군의 그 같은 모습을 ‘오랑캐답지 않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국 상황 못 읽고 병자호란 맞아
“오랑캐는 100년 못 가 멸망” 믿어

“몽골·일본도 오랑캐” 헛된 자부심
18세기에서야 북학파 객관적 인식

19세기 서구 열강도 ‘서양 오랑캐’
지금 우리가 보는 중국의 실체는…

조선 지식인은 여진족을 ‘오랑캐’이자 ‘금수(禽獸)’로 여겼다. 또 조선을 ‘대국’이자 ‘상국’으로 자부하면서 여진족을 제어하기 위해 고민했다. 세종대 육진(六鎭)을 개척했던 김종서(金宗瑞·1383∼1453)는 “은혜가 없으면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위엄이 없으면 그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없는데 은혜가 지나치면 교만하게 되고 위엄이 지나치면 원망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은혜와 위엄을 적절히 병용하여 여진족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760~1761년 청나라 연경(燕京·북경)을 다녀온 사신 일행을 그린 ‘경진년 연행 도첩(燕行圖帖)’ 중 일부. 1780년 역시 연행사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남겼다. [사진 문화재청]

1760~1761년 청나라 연경(燕京·북경)을 다녀온 사신 일행을 그린 ‘경진년 연행 도첩(燕行圖帖)’ 중 일부. 1780년 역시 연행사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남겼다. [사진 문화재청]

여진뿐 아니라 몽골과 일본도 오랑캐라고 멸시한 조선 지식인은 “오랑캐의 운세는 백 년을 가지 못한다(胡運不百年)”고 믿었다. 오랑캐가 간혹 천하를 제패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늘이 그들의 융성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왕조는 백 년이 못 가서 멸망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16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는 ‘하찮은 오랑캐’들이 굴기(崛起)하면서 격동하고 있었다. 1592년 조선이 왜노(倭奴)·왜적(倭賊)이라고 여겼던 일본이 “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을 정복한다”며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 조정이 의주까지 내몰렸던 1592년 9월, 이번엔 조선이 ‘오랑캐 추장(奴酋)’이라고 불렀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가 “조선에 원병을 보내 일본군을 물리치겠다”고 제의했다. 조선은 후환을 우려하여 제의를 거부했지만 그들을 괄목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하찮은 오랑캐’가 아니라 떠오르는 강자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들어 건주여진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칭하며 건국을 선포하더니 1618년에는 명에 선전포고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지식인의 입장은 확고했다. “명을 위해서라면 나라가 망하더라도 오랑캐와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급기야 1636년 2월, 자신들이 제국(帝國)을 칭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청 사신 용골대(龍骨大) 일행이 입경했을 때 척화파 대표 홍익한(洪翼漢)은 “용골대의 목을 쳐서 상자에 담아 명으로 보내 오랑캐의 오만함을 응징하라”고 절규했다.

남한산성의 굴욕은 예정된 수순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앙포토]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앙포토]

이처럼 준열한 화이론(華夷論)을 바탕으로 ‘청 사신의 목을 치자’는 초강경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심양(瀋陽)에 사신을 보내 청의 동향이나 청군의 실태를 탐지해 보자”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었다. ‘오랑캐와 타협하여 명을 배신하는’ 비겁한 행위로 매도됐다. 하지만 청의 의도와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과격한 구호만으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청군의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이렇다 할 전투조차 해보지 못한 채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내몰렸던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청은 하찮은 오랑캐’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던 윤휘가 군기가 잡혀 있고 대오가 반듯한 청군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1637년 1월, 인조는 결국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대다수 지식인은 청에게 항복한 것을 ‘하늘과 땅이 뒤바뀐 변고’로 여겼다. 일부 척화신들은 청에 항복한 인조를 ‘더러운 군주(汚君)’로, 청과 강화 협상을 주도했던 주화신(主和臣) 최명길(崔鳴吉·1586∼1647)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보다 더한 간신’으로 매도했다. ‘오군’과 ‘간신’이 주도하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포기하고 낙향하는 신료들이 잇달았다.

1641년, 조선은 청의 강요에 밀려 청군이 명의 금주성(錦州城)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다. 전투가 한창일 때 성주(星州)의 양인 출신 조총수 이사룡(李士龍)은 탄환을 제거한 채 공포(空砲)을 쏘다가 청군 감독관에 발각돼 처형된다. “명군을 차마 살상할 수 없어 그랬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하찮은 오랑캐’ 청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1644년 명이 망하자 조선의 치욕과 명의 원한을 씻기 위해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한다.

병자호란 이후 대다수 지식인이 청에 대해 복수(復讎)를 외치고 있을 때 일각에서는 청의 실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우선 ‘간신’이자 ‘비겁자’라는 매도를 무릅쓰고 청과의 화친을 주도했던 최명길이 그러했다. 그는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고 운수가 맞으면 제업(帝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천하의 이치’라고 보았다. ‘하찮은 오랑캐의 운세는 백 년을 가지 못한다’는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 수행원으로 심양에 갔던 김종일(金宗一·1597∼1675)의 인식은 더 놀랍다. 청의 실상을 예민하게 관찰한 그는 1639년, 청의 지배층이 안민(安民)에 힘쓰는 것, 인사(人事)를 철저히 능력에 따라 시행하는 것, 군대의 기강을 확실하게 유지하는 것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청의 지배층이 질박하면서도 제대로 된 정치를 펴는 데 비해 조선과 명은 정령(政令)이 번잡하고 자질구레하며 기강이 없다고 혹평했다. 김종일은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청을 ‘천하무적’이라고 보았다.

극단적 폄하와 과도한 공포 병존

박지원

박지원

김종일 등의 객관적 인식은 조선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복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북벌을 꾀했던 효종(1619∼1659)은 조선군이 만주로 쳐들어가면 명의 유민(遺民)들이 감동하여 합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1673년 청에서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난 직후, 북벌을 주장했던 윤휴(尹鑴·1617∼1680)도 효종과 유사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청은 전성기에 접어들어 조선이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은 청을 칠만한 군사력과 그 기반이 되는 경제력이 없었고, 청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갖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681년 청이 삼번의 난을 가볍게 진압하자 조선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박지원(朴趾源·1737∼1805) 등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中華)’이자 조선이 배워야 할 ‘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청이 비로소 북벌의 대상에서 북학(北學)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까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랜 우여곡절 끝에 청을 ‘중화’이자 ‘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된 조선 앞에는 또 다른 얄궂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세기 초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시대 청은 더는 ‘강국’도 ‘선진국’도 아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게 참패한 것은 그것을 웅변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에도 조선은 청을 여전히 ‘중화’이자 ‘기댈 언덕’으로 여겼던 반면 영국 등 서구 열강을 ‘서양 오랑캐(洋夷)’라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양이’들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또 다른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한편에서는 여전히 가짜 혹은 싸구려나 만드는 후진국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폄하가,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보복을 우려하여 마땅히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극단적인 공포가 병존하고 있다. 양극단을 넘어 중국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