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불닭볶음면, 백양, 쥬시후레시…이들의 공통점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72) 

편의점에 가면 레트로, 감성 등을 컨셉으로 알록달록한 디자인에 한글 이름을 붙인 많은 맥주가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성산일출봉, 경복궁, 광화문 같은 랜드마크 이름을 단 맥주가 냉장고를 점령하더니 이제는 불닭볶음면, 금성, 쥬시후레쉬, 백양 등 이른바 콜라보 맥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의 새로운 맥주 출시 소식이 날아들고,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특색 있는 제품을 구해 SNS에 올리는 것이 하나의 놀이가 됐다.

올해 주요 편의점에서 국산 수제맥주의 판매는 전년 대비 2~3배씩 늘었다. 5~6배씩 급성장한 그래프를 그린 작년에 이은 것이다. 편의점의 전체 맥주 매출 중 국산 수제맥주가 차지하는 비중도 10%대 중반까지 올라갔다. 2018년 편의점의 국산 수제맥주(중소형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 판매가 허용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수입맥주로 가득 찼던 편의점 냉장고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집에서 수십m만 걸어나가면 국산 수제맥주를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다니….

곰표 맥주. [사진 BGF리테일]

곰표 맥주. [사진 BGF리테일]

하지만 몇 번의 경험은 편의점 국산 수제맥주가 세상 쓸데없는 물건으로 보이게 했다. 품절 대란이라는 곰표 맥주를 어렵게 구해 마셨을 때의 실망감을 잊지 못한다. 밀가루 기업 곰표와 세븐브로이가 콜라보하면서 밀맥주라는 점을 앞세웠지만 어떤 밀맥주 스타일에도 속하지 않는 맛이었다. 밀맥주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고 이해해보려 해도 인공적인 착향이 만들어낸 비누 같은 맛에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이어 마셔본 몇 개의 맥주 역시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한 맛이어서 더이상 국산 편의점 수제맥주를 쳐다보지도 않게 됐다.

이런 내 평가와 달리 편의점 국산 수제맥주는 승승장구했다. 편의점은 4캔 1만원 가격 전략과 이색 콜라보로 코로나19 시대 홈맥 시장을 이끌며 점점 국내 맥주 유통의 골리앗으로 떠올랐다. 편의점과 중형 양조장들은 맥주 이미지와 동떨어진 이름 찾기 경쟁을 벌이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맥락 없는 콜라보와 네이밍을 이어갔다. 그나마 곰표와 CU, 세븐브로이의 콜라보는 밀맥주라는 개연성이라도 있었다. 잇달아 나온 가전·아웃도어·속옷 브랜드, 껌, 라면, 배달앱 등과의 콜라보 맥주를 보면서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편의점이 독점 판매 맥주를 요구하면서 양조장들이 기존 맥주에 포장만 바꿔 내놓은 제품도 있다. 적당히 좀 하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진라거 등 네이밍과 맥주 맛이 어울리면서 풍미도 균형을 이루는 일부 맥주도 있지만 오히려 콜라보 맥주에 대한 피로감이 손을 뻗지 않게 만들었다. 수제맥주가 소규모로 만든 맥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때 오비맥주가 만든 노르디스크, 캬 등이 편의점에서 수제맥주로 포지셔닝하고 팔려나간 것도 웃픈 부분이다.

세븐일레븐과 배달의민족이 내놓은 콜라보 수제맥주 '캬'. [사진 세븐일레븐]

세븐일레븐과 배달의민족이 내놓은 콜라보 수제맥주 '캬'. [사진 세븐일레븐]

이처럼 편의점에 화려한 라벨을 입은 맥주가 날이면 날마다 늘어나고 있음에도 맥주의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혹독한 시기가 왔다. 화장만 곱게 한 편의점 맥주는 마시고 싶지 않은데, 맛에 진정성을 가진 다른 맥주들은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 맥주를 유통할 역량이 되는 10여 개 양조장은 편의점 판매용 4캔 1만원 짜리 맥주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고 나머지 소형 양조장의 맥주는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마트와 편의점에 국산 수제맥주 판매가 허용됐을 때 PK마트 등에 지역 소형 양조장 맥주를 판매하는 코너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때 대형마트들이 경쟁적으로 맥주 라인업을 확대했지만 이제는 마트에도 ‘4캔 1만원’ 외 맥주를 찾아보기 어렵다. 헬레스, 슈바르츠 비어, 비엔나 라거 등 다양한 라거와 영국식 에일 등은 자취를 감췄다. 동네의 보틀숍이 문 닫는다는 소식이 이제 더이상 놀랍지도 않다.

코로나 시대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편의점 ‘4캔 1만원’ 콜라보 제품이 성장의 대부분을 견인하고 있다. 이런 제품의 인기는 수제맥주 양조장의 브랜딩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비자는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양조장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는다. 콜라보라는 이름으로 만든 맥주가 스테디셀러가 돼 양조장의 지속가능성에 보탬이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간판만 바꿔 다는 편의점 맥주에 길들어져 버린 소비자. 양조장들이 4캔 1만원 맥주를 만들어 편의점에 들어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 편의점 주도로 기획·유통되는 수제맥주.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기현상이다.

독특한 네이밍으로 재미 보는 콜라보 맥주의 시대가 과연 오래 갈 수 있을까? 답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