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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보아 오빠 상처 받고 하늘 갔지만…오늘도 '3분진료'에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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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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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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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보아의 오빠 고(故) 권순욱(뮤직비디오 감독)씨는 9월 초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지난 5월 인스타그램에 의사에게 받은 상처를 글로 남겼다. “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몸에 고통 주지 말고 그냥 편히….” 등 비수가 된 말을 되새겼다. 권 감독은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의사들은 왜 그리 싸늘한가요?”라고 물음표를 던졌다.

당시 의료계는 “‘3분 진료’ 하느라 바빠서…”라고 항변했다. 반나절에 많게는 100여 환자를 보느라 핵심만 챙기기도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3분 진료는 한국 의료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코로나19로 지난해 외래환자가 줄면서 3분 진료에 약간의 금이 가는 듯했지만, 올해 되돌아갔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외래환자당 평균 진료시간(매년 1~8월)은 2019년 4.37분에서 지난해 4.61분으로 늘었고 올해 4.44분으로 다시 줄었다. 외래환자가 2019년 1~8월 111만5397명에서 지난해 104만7675명으로 줄었고 올해 114만3997명으로 증가한 것과 관련 있다. 서울아산·삼성서울·세브란스병원·서울성모병원도 비슷하다.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3분 진료는 달라지지 않고, 권 감독이 생전에 겪은 아픔도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대병원 등 평균 4분에 그쳐
15분 진료하니 환자만족도 높아
3분이든, 30분이든 진료비 같아
수가·수익구조 바꿔야 지속 가능

서울대병원 진료시간 밀려드는 환자에 3분 진료 여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서울대병원 진료시간 밀려드는 환자에 3분 진료 여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경기도 고양시 이모(29)씨는 건강검진에서 췌장암 종양 표지 수치가 높게 나와 작은 병원 검사 결과를 들고 7월 서울의 대형병원 소화기내과를 찾았다. 의사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증상이 어떠냐, 가족 중 이런 증세가 있느냐” 등을 물었다. 그러더니 “이상 없다. 산부인과로 가라”고 말했다. 3분이 채 안 걸렸다. 산부인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궁금한 점 있으세요”라고 말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것 같아서 질문할 엄두를 못 냈다. 용기를 내 “원인이 뭐냐. 수술하면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딱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수술 날짜를 잡긴 했지만 의사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고, 안심시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심층진찰하니 병력 청취 꼼꼼

3분 진료를 깨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심층진찰, 즉 ‘15분 진료’ 시범사업이 그것이다. 10~15분 진찰하는 게 원칙이다. 2018~2020년 전국 25개 상급종합병원 의사 361명이 환자 2만3072명(초진환자만 해당)을 심층 진료했다. 서울대병원 임병찬 교수(소아청소년과)팀이 최근 심층진찰 시범사업 보고서를 보건복지부에 제출했다. 심층진찰을 선택한 환자는 희귀난치병·암 같은 중증환자가 많다. 환자당 평균 진료시간은 18.5분, 최장 시간은 37.1분이다.

3분대 외래 진료 8개과.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3분대 외래 진료 8개과.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심층진찰을 받은 환자의 반응이 어떨까. 임병찬 교수팀은 환자 380명의 만족도를 0~5점 척도로 매겼다. 진찰과정에 대해서는 3.95점으로 상당히 높았다. 대표적인 세부 항목인 환자가 들고 온 기록 검토(4.17점), 병력 청취(4.07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의사는 시간 여유가 있으니 그 전 병원의 진료·검사 기록을 꼼꼼히 보고, 언제부터 어떻게 병을 앓았는지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진단 만족도가 4.13점으로 높게 나왔다. 자료·상태·질병 설명도 만족스러워했다.

6분 넘게 진료하는 과.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6분 넘게 진료하는 과.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 하버드대 부속 브리검 여성병원 내과의사 버나드 라운은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환자의 치유보다 처치가, 치료보다 관리가 중요해졌다. 환자 말에 귀 기울이던 의사는 사라지고 의료장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며 “병력을 청취하는 것은 진단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이며 단순 대화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환자의 표정과 몸짓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썼다.

삼성서울병원 성지동(순환기내과) 교수는 “처음 오는 환자를 진료하는 데 15분도 부족하다. 지금의 3~4분 진료가 잘못된 것이고 심층진료가 일반적 형태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성 교수는 “환자에게 좀 더 설명하고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환자가 자기 얘기를 안 들어주고 말을 자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만이 생기고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환자 아픔에 공감하는 훈련도 필요

심층진찰 받은 환자 만족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심층진찰 받은 환자 만족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은 일부(정신건강의학과 등)를 제외하고 의사의 진료시간이 길다고 수가가 높지 않다. 병원 경영진은 오래 진료하는 의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서울대병원 임재준(호흡기내과) 교수는 “서울대병원이 모든 환자를 15분 진료하게 되면 전체 환자를 10분의 1로 줄여야 한다. 외래환자를 안 보고 다른 병원이 보낸 중증환자를 담당하는 병원으로 가려면 연간 1000억원의 손실이 생긴다”고  말한다.

15분 진료할 경우 환자와 교감할까. 임병찬 교수 조사에 따르면 의사에 대한 환자의 감정적 만족도(친절·신뢰, 말할 기회 제공)는 3.03점으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임재준 교수는 “권순욱 감독 같은 아픔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3분 진료로는 불가능하다. 3분 진료에서는 핵심정보만 전달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의사들이 평생 3분 진료를 해와서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얘기를 들어주는 훈련이 덜 돼 있다. 의사 양성 과정에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