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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그때 그 시절 한국에도 외교가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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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회고문집으로 본 공로명 외교 

공로명(왼쪽)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을 해결하고 선투 중국 대표와 합의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사진 공로명]

공로명(왼쪽)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을 해결하고 선투 중국 대표와 합의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사진 공로명]

공로명 전 외무장관은 ‘한국 외교의 산증인’이라는 상투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가 아주국장, 차관보, 브라질ㆍ소련ㆍ일본 대사를 거쳐 외무부 장관을 지낸 경력 때문만이 아니다. 한ㆍ일 국교정상화 협상,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교섭, 주(駐)소련 대사관 개설, 남북 핵협상, 한ㆍ일 과거사 현안 대응 등 그의 손을 거쳐 간 일들을 모으면 말 그대로 ‘한국 외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발간된 『공로명과 나』(도서출판 월인)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그와 함께 일한 외교관 후배와 관련 분야 지인 52명의 회고담을 묶은 9순 기념문집이다. 찬양일색이 되기에 십상인 여타 헌정문집들과 다른 건 ‘남기고 싶은 외교비화들’이란 부제에 걸맞게 사료적 가치가 있는 일화나 비사 등 사실 위주의 기술이란 점이다. 단순한 흥미를 넘어 ‘외교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값진 교훈을 던지는 대목도 곳곳에 들어있다.
 필자가 공로명 전 장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온화한 성격과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진지한 자세, 폭과 깊이를 겸비한 지식 등이다. 그런데 그가 온유함뿐 아니라 협상가나 전략가로서의 필수 덕목인 단호함과 결기를 함께 갖추고 외교 현장에서 발휘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됐다.  몇몇 대목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북한·중국·미국에 할 말 다하며 #원칙 지키고 실리 챙긴 협상가 #고노 담화 이끌어낸 대일 외교 #국민감정보다 나라 앞길을 우선시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 밑거름
 #1. 노태우 정부에서 결실을 맺은 북방외교는 냉전 종식이란 세계사의 흐름을 잘 읽고 능동적으로 헤쳐간 결과물이었다. 실은 그 이전에도 북방외교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 중국과는 일체의 교류가 없던 1983년 5월 발생한 중공 민항기 피랍사건으로 한국 외교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중국과의 첫 정부 간 교섭을 맞게 됐다. 언젠가 닥칠 한ㆍ중 관계 수립을 염두에 두고 첫걸음을 잘 내디뎌야 하는 지난한 임무가 당시의 외무차관보 공로명에 떨어졌다.
 중국 대표단은 탑승객은 물론 납치범까지 인도하라고 요구했고 합의문에도 공식 국가명칭은 사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공 차관보는 굽히지 않고 “남의 집 안방에 구두 신고 들어와서는 그 주인한테 제대로 인사도 안 하겠다는 거냐”고 압박했다. 그 결과 납치범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지키고 합의문에 공식 국명과 직명을 명기해 선례로 남겨야 한다는 입장을 관철했다.
 민항기 사건 처리가 끝난 뒤 공 차관보는 “평화통일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그 전 단계는 남북한에 대한 교차승인을 이루는 것이고 그에 앞서 중ㆍ소와 접근을 추진해야 한다”는 정책 건의서를 만들었다. 이범석 외무장관은 이를 토대로 그해 6월 공산권과의 북방외교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훗날 노태우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한 북방외교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게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의 회고다.

북한 인권문제 첫 제기
 #2. 공로명은 외교안보연구원장 시절 남북한 간의 핵협상 채널인 남북핵통제위원회 수석대표를 겸임했다. 북한 대표 최우진 외무성 부부장은 번번이 준비된 원고를 장황하게 읽으며 회담을 일방적 체제선전장으로 몰고 갔다. 어느 날 6ㆍ25 전쟁이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의 북침으로 시작됐다는 대목이 나오자 공 원장이 갑자기 최 부부장에게 김일성과 스탈린이 모의해서 일으킨 증거라며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최 부부장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북북 찢기 시작했다. 공 수석대표가 “아이고, 수령님 얼굴을 막 찢어도 되나”라고 하자 최우진이 사색이 됐다. 그는 또 호주머니에서 우황청심환을 꺼내 “남쪽에서 만든 건데 열 받을 때 특효약”이라며 건네기도 했다. 그는 늘 판에 박힌 발언만 반복하는 북측 대표들에게 “평양만 바라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라”고 다그친 적도 있다.
 그가 외무장관이 된 뒤인 1995년에는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최초로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 인권상황에 대해 우리 정부의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북한 주민이 같은 동포로서 누구나 누릴 권리가 있는 보편적 인권을 향유해야 한다.” 2003년 북한 인권 문제가 유엔 의제로 상정되어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기보다 8년 전의 일이었다. 오준 전 유엔대사에 따르면 정부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민주화를 중시해온 김영삼 정부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침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끝에 유엔 연설로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 한국은 대북 인권결의안 표결에서 수년째 기권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북핵 문제의 당사자는 한국이었다. 공 수석대표와 함께 협상장에 나갔던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의 설명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핵 협상은 미국과 북한이 아니라 남북이 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 정부가 북핵 협상에서 배제된 채 중재자 운운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중략) 김영삼 정부는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몽니 앞에 너무도 쉽게 북핵협상 당사자에서 비켜서며 북ㆍ미 협상을 용인했다. 노태우 정부가 힘겹게 구축한 ‘한반도 당사자 해결원칙’을 아주 가볍게 포기했다. 이는 한반도의 정치ㆍ군사문제는 한국이 주도한다는 원칙이었다. 이후 한국은 북핵협상의 당사자에서 제3자의 지위로 전락했다. 한국인들이 북핵 문제를 우리 문제가 아니니 북ㆍ미 사이의 문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위안부 강제성 인정토록 한 대일외교
 #3. 대일 외교는 동북아과장과 아주국장을 지낸 공로명의 전공분야였다. 그가 주일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위안부 문제와 일본 각료들의 망언 문제 등으로 한ㆍ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공 대사는 고노(河野)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안부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행해졌다”라는 문장을 넣어야 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낸 것이다. 이 문장은 2014년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 할 때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일본 문화가 음성적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양질의 일본 영화와 음악을 정식으로 수입하는 게 좋다”며 훗날 김대중 정부에서 실현되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먼저 제안한 것도 주일 대사 시절의 공로명이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이 인정하듯 그는 한ㆍ일 월드컵 공동개최가 성사되게 한 공로자이기도 했다.
 이런 성과들은 일본 외교에 종사하면서 쌓은 두터운 인맥과 신뢰, 그리고 일시적인 기류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관철하는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일대사관에서 그를 보좌했던 심윤조 전 의원은 “정책 담당자는 때로는 국민감정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나라의 잎길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국민감정에만 휘둘려서는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당시에 배웠다”고 적었다.

외교와 학문의 동반자였던 고 최서면(오른쪽) 국제한국연구원장과 함께 2008년 독도를 방문한 공로명 전 장관. 예영준 기자

외교와 학문의 동반자였던 고 최서면(오른쪽) 국제한국연구원장과 함께 2008년 독도를 방문한 공로명 전 장관. 예영준 기자

"미국이 동맹국 팔 비틀 수 있나" 
 #4. 원칙과 소신을 잃지 않는 자세는 동맹국 미국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95년 그가 외무장관으로 재직할 때의 최대 현안은 북ㆍ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할 경수로에 한국형 원자로를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핵협상의 주도권이 북ㆍ미 협상으로 넘어감에 따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귀동냥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부분적이나마 한국의 역할을 되찾아 오는 의미가 담긴 방안이었다. 하지만 한국형 경수로를 명기하는 것은 북한이 가장 싫어할 수 있는 선택지여서 미국도 난색을 표했다.
 이때 노련한 협상가 공 장관은 북ㆍ미간 문서와 실제 집행기구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문서에 서로 다른 표현을 쓰는 방안을 제시해 관철했다. 당시 북ㆍ미 협상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대사가 방한해 북한 입장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공 전 장관은 “미국이 어떻게 동맹국의 팔을 비트느냐(arm twisting)”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배석자들도 놀랄 정도로 미국을 압박한 했다. 하지만 당시의 한ㆍ미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고 공 전 장관이 물러나자 미국이 유감을 표시해 오기도 했다는 게 후배들의 공통된 회고다.

 공로명 외교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원칙의 중요성과 이를 관철할 수 있는 협상 능력이다. 한번 무너진 원칙은 복원하기 어렵고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외교는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그 과정에서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 준다. 단호함과 기품을 동시에 갖추고 협상력을 발휘해 국익을 지키려 한 외교관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배출되기를 바란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