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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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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정치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풍족히 저장하고 군비를 넉넉히 갖추고, 백성에게 신뢰받는 것이다.”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요?” “군비다.” “하나를 더 버려야 한다면요?” “식량을 버려라. 백성의 신뢰를 잃는다면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금과옥조였던 ‘무신불립’의 출처는 『논어』다. 공자는 국가 유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백성의 신뢰’를 꼽았다. 실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이 이반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망했다. 이런 진리를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고 표현한 건 『순자(荀子)』다.

백성은 조용하고 어수룩해 보일지 몰라도 바보가 아니다. 멍시엔스(孟憲實) 중국 인민대 교수는 저서 『정관의 치』에서 왕세충의 실례를 들었다. 수나라 말기의 장수 왕세충은 여론 조작으로 황제를 속인 뒤 선양의 형태로 옥좌를 빼앗았다. 정나라를 세운 그는 “백성과 함께 정치하겠다”며 황제 행차 때 백성이 사전 대피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고, 조회도 황궁 밖에서 열었다. 하지만 싫증이 났던지 불과 며칠 만에 쇼를 접었다. 백성은 금세 그의 실체를 간파했고, 앞다퉈 당나라로 도망쳤다. 멍 교수는 “황제는 쉽게 속일 수 있지만, 백성은 속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우리 국민이 사나운 물이 됐던 건 지난 정권이 ‘무신불립’을 입으로만 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신뢰를 거두면서였다. 그렇다면 혁명의 물줄기에 얹혀 권력을 차지한 현 정권은 신뢰를 회복했을까.

“너나 맞아라” “쇼 집어치워라” “맨날 똑같은 소리나 하는데 AI(인공지능)냐.” 최근 열린 사회부총리와 질병관리청장 주재 온라인 생중계 방송 창에 적나라하게 올라온 댓글들이 답을 대신한 듯 보인다. 사태 초기부터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면서 오락가락 우왕좌왕해온 정치적 방역이 ‘K-방역’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 분노한 민심의 뒤끝이다. 조용히 정부를 뒤따르던 백성이 서서히 노도(怒濤)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가 이문구라면 민심을 이렇게 요약했을 성싶다. “이런 디서 살아두 짐작이 천리구, 생각이 두 바퀴 반이란 말여. 말 안 하면 속두 없는 중 알어. 촌것이라구 업신여기다가는 불개미에 빤스 벗을 중 알어.” (『우리동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