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크라이나 판돈 키우는 러시아 “유럽에 중거리핵 배치 고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13일(현지시간) 전화 회담에서 미국과 유럽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동맹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국제적 법적 합의”를 요구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이 보도했다.

크렘린궁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나토의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군사적 탐색은 러시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며 “나토의 동진(東進)과 우크라이나에 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명확한 법적 합의를 위한 초안 문서를 러시아가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존슨 총리는 “우크라이나 국경에서의 러시아군 증강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며 “(러시아의)불안정한 행동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전략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영국 총리실이 밝혔다.

지난 달 미국 정보당국이 제기한 러시아의 내년초 우크라이나 침공 위기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의 긴장은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옛 소련의 핵 전쟁 위기인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까지 거론하는 러시아의 속내를 놓고 서방 국가들은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이날 거론한 ‘법적 안전보장’의 의미에 대해 외신들은 같은 날 세르게이 랴브코프(Sergei Ryabkov) 러시아 외교부 차관이 언급한 중거리 핵전력(INF) 문제를 연결짓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해병대가 지난 2018년 옛 소련 연방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340km 떨어진 네미르세타 마을 인근 발트해에서 군사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나토는 러시아가 2014년 크림 반도를 합병한 것에 대해 러시아 근교에 병력을 증강하고 발트해 회원국들의 영토에서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대응했는데, 크렘린은 이 작전을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해병대가 지난 2018년 옛 소련 연방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340km 떨어진 네미르세타 마을 인근 발트해에서 군사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나토는 러시아가 2014년 크림 반도를 합병한 것에 대해 러시아 근교에 병력을 증강하고 발트해 회원국들의 영토에서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대응했는데, 크렘린은 이 작전을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랴브코프 차관은 13일 국영 RIA 인터뷰에서 “나토의 행동에 따라 러시아는 중거리 핵전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한 안전 보장의 일환으로 서방 세계는 러시아가 제안한 유럽에서의 ‘INF 모라토리엄(일시 동결)’에 참여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로서는 군사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쪽에서 군사적 수단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랴브코프 차관은 이어 “지금 상황은 과거 카리브해 위기(쿠바 위기) 때와 비교될 수 있다”면서 “러시아 국경 근처에 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훈련을 포함한 도발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하며 이는 법적 구속력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30년 전 종식된 냉전 시대의 긴장과 새로운 군비 경쟁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측이 요구하고 있는 ‘INF 모라토리엄’은 러시아와 유럽 양쪽이 중거리 핵전력 배치를 일시 동결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INF 조약은 냉전 때 미ㆍ소의 핵 미사일 ‘치킨 게임’을 막기 위해 500~5500km(중단거리) 핵미사일을 폐기ㆍ제한하기로 한 약속을 말한다. 87년 12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체결해 이듬해 발효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난 2019년 “러시아가 수년 전부터 INF 조약을 위반했다”며 INF 조약을 폐기했다. 러시아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지상 발사 순항 미사일 ‘9M729’(사거리 2500km)를 배치했다는 이유에서다. 서방은 ‘스크루 드라이버’라고 부르는 전략 무기다. 러시아는 미국 측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동시에 유럽에서의 핵무기 동결을 제안했는데, 유럽 국가들은 “실제로는 유럽만 제한하는 효과가 있는 것 아니냐”며 선뜻 응하지 않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지난 달 초 미 육군 소속 제56포병 사령부를 되살렸다. 러시아는 제56포병 사령부가 1980년대 미국의 중거리 핵전력의 핵심이었던 퍼싱-Ⅱ 미사일 등을 운용했던 부대였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이와 관련 유엔군축연구소의 파벨 포드비그 수석 연구원은 “미국과 나토는 재래식 미사일을 배치하더라도 러시아는 RS-26 등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구축함 USS 로스호의 해군 장병들이 올해 7월 흑해에서 기동훈련 중 날아오는 러시아 군용기를 가리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6월 크림반도 인근 바다에서 영국 구축함과 러시아 군함이 대치한 이후 흑해 훈련을 실시했다.[AP=연합뉴스]

미국 구축함 USS 로스호의 해군 장병들이 올해 7월 흑해에서 기동훈련 중 날아오는 러시아 군용기를 가리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6월 크림반도 인근 바다에서 영국 구축함과 러시아 군함이 대치한 이후 흑해 훈련을 실시했다.[AP=연합뉴스]

미국 측 주장대로라면 랴브코프 차관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 발언은 새로운 위협 거리는 아니다. 다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중거리 핵전력을 늘리는 명분 쌓기를 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번 사태가 자칫 동부 전선의 군비 경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 외교 및 군축 전문가인 게르하르트 망고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교수는 “기존에 핵전력 배치를 한 게 아니라는 러시아 주장이 맞다면, 이번 러시아의 요구는 서방을 향해 핵전력 동결과 관련한 마지막 신호를 보낸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나토는 러시아의 내년초 우크라이나 침공 시나리오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위성 사진 등을 근거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마주한 국경에 내년 최대 17만 병력을 집결시킬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7일 유선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을 향해 2014년 러시아의 크람반도 합병 사태를 거론하며 “끔찍한 대가”를 직접 경고했지만, 푸틴 대통령의 속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실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할지, 바이든 정부를 상대로 ‘협상의 칩’을 올리는 것인지를 놓고서다.

이런 가운데 미 CNN 방송은 지난 12일 러시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푸틴 대통령이 소련 시절을 “역사적 러시아”로 불렀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푸틴 대통령은 1991년 소련 해체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면서 “소련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러시아가 붕괴된 사건이었다”고 발언했다. CNN은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15개 소비에트 연방국가 시절 러시아 권력을 바라보는 푸틴의 시각을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