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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멍청 비용’, 시스템도 책임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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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보이스피싱은 결과적으로 ‘첨단 성장’ 산업이었다. 지난해 피해 규모는 7000억원대이고 올해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지난해 한국에서 올린 매출(7162억원)과 맞먹는다.

애송이의 장난질 같던 범죄를 달리 보게 된 계기가 내게도 있었다. 4년 전 어느 날, 신문사 사회부 앞자리 행정 여직원의 표정이 안 좋았다.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병인데도 일처리가 야무지고 차분한 그였다. 그날 평소보다 자주 자리를 비우며 어두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나’ 하던 차에 여직원이 갑자기 휴대전화를 나에게 건넸다. “기자님, 한번 받아봐 주실래요?”

보이스피싱 15년 피해자 25만
극단 선택 아들 사칭한 문자도
핀테크 외친 헛똑똑이의 실상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그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이 짐작됐다. “여기 신문사 사회부인데 무슨 일이시죠.” 목소리를 잔뜩 깔았더니 ‘작전 실패’를 감지한 수화기 너머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하느냐”는 반격은 막무가내의 욕설과 조롱 앞에 무기력했다. 끊겨버린 전화에 몸이 부들거렸지만,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직원은 눈물을 터뜨렸다. “당신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는 ‘그놈 목소리’와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상대방 신분 확인을 하려고 팩스까지 받았다고 했다. 떨리는 손에 ‘김민수 검사’의 신분증 사본이 들려 있었다. 물론 가짜였다. 피해는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와, 진짜 무서운 놈들이구나.’

그로부터 약 3년 뒤, 정은재(55)씨가 그 목소리에 아들을 잃었다. 김민수 검사 사칭 보이스피싱에 420만원을 잃은 아들 고(故) 김후빈씨(당시 28세)는 낙담한 상태로 세상을 등졌다. 엄마는 1년 3개월 만에 붙잡힌 범인 서모(47)씨의 재판에 아들 영정을 들고 참석한다. 중앙일보 취재진을 만난 엄마는 “사람을 죽게 했으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가벼운 형을 살고 출소하면 다시 쉽게 돈 버는 ‘그 짓’을 할 테고, 그래서 또 다른 후빈이가 나올까봐 두렵다면서다. 실제로 정씨는 최근에도 아들을 사칭하는 문자를 받았다. “엄마 나 후빈이야. 폰 고장이라 매장에 맡겼어…” 천인공노할 메시지가 엄마의 휴대전화에 아직 있다.

15년 전인 2006년 5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이스피싱 피해가 보고된 이래 누적 피해자는 25만 명 안팎이고 피해 규모는 3조원을 넘는다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범죄는 진화하고 피해는 폭증했지만, 그대로인 건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이다. 중앙일보 취재팀이 보이스피싱예방협회와 공동으로 설문 조사한 피해자 63명 중 76%는 ‘두려움’ ‘분노’ ‘죄책감’ 등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었다. 은행 대출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4000만원을 사기당한 60대 남성은 “살 만큼 살았구나, 죽으라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부 피해자는 잃은 돈을 ‘멍청 비용’이라며 자책했다. ‘개인정보 관리’ 운운하는 잘난 시스템 앞에 주눅이 든 것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 박모(53)씨와 그 가족은 은행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어느 일요일 오후 딸의 이름으로 온 문자에 당했다. “휴대폰이 고장 나 임시폰을 쓴다”는 문자에 황급히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내주고 원격조종 앱을 설치한 게 실수였다. 그날 박씨의 계좌에서 1억5000여만원이 이체됐다. 스마트폰을 장악한 일당은 주민증 사진으로 모바일OTP(One-Time Password·일회용 비밀번호)를 발급받아 이체 한도를 늘리고 새로운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박씨 가족은 그 복잡하고 대단한 시스템을 향해 이렇게 묻고 있다. “그 문자를 쉽게 믿어버린 잘못은 있지만, 신분증 사진과 원본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비대면 실명 확인을 강행하는 금융 당국의 책임까지 피해자가 모두 져야 하는가.”

쉽게 뚫릴 수 있는 비대면 서비스를 소비자가 앞장서 원한 적은 없었다. 박씨의 거래 은행은 사건 발생 뒤 모바일OTP 하루 이체 한도를 5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축소하기도 했다.

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은 보이스피싱을 “서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반사회적 범죄”라고 규정하며 “특단의 대책”을 주문했다. 정부는 신고, 피해 구제, 위험 경보, 예방 등 시스템의 ‘고도화’에 나설 참이다. 지난 15년간 정부와 금융·수사 당국을 갖고 논 보이스피싱의 ‘성과’를 떠올리면 한참 늦은 뒷북이다. 핀테크, 인터넷 금융을 외치던 ‘헛똑똑이 놀음’이 새삼 한심하다. 멍청 비용이 피해자만의 몫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