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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으로 속인 뒤…만나서 돈 뜯는 ‘피싱’ 작년 1만5000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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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해 9월 서울 중랑구의 한 지하철역. 하늘색 긴 소매 와이셔츠 차림에 안경을 끼고, 검은 서류가방을 든 30대 남성이 열차에 올라탔다. 1시간 뒤 이 남성은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포착됐다. 옷은 티셔츠로 갈아입었고, 가방은 백팩으로 바뀌었다. 5시간 뒤엔 강남구의 한 미용실에서 펌을 한 뒤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11명에게 2억5000만원을 뜯어낸 보이스피싱 일당 중 한 명이었다. 그가 7시간 동안 5차례 변장을 한 이유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현금만 사용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탔고 택시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CCTV를 토대로 이 남성의 신원을 특정해 2개월 만에 검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이 표준으로 자리잡으면서 보이스피싱범들은 대담해졌다. 비대면으로 철저히 속인 뒤 면전에서 돈을 뜯어가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보이스피싱 대면편취는 1만5111건으로 전년보다 약 5배 증가했다.

대면편취에서 돈을 건네받는 이른바 ‘수거책’들의 수법도 치밀해졌다. 지난 2월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하철 공중화장실에서 ‘똑, 똑, 똑, 똑’ 노크를 4번 하는 것을 암호로 정해 돈을 주고받던 보이스피싱 일당을 검거했다. 이들에게 속은 피해자는 29명, 피해 금액은 11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범죄망 키우는 피싱범 … 서민들도 끌어들여 

비대면 사회가 보이스피싱 ‘범죄망’을 더욱 키우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줄어든 서민들이 ‘고액 아르바이트’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수거책 모집 공고에 홀려 가담하기도 한다. 이들 중엔 경찰에 체포된 후에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피해 유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 유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온라인이 일상인 청년들은 보이스피싱의 유혹에 더 취약하다. 지난해 경찰대학이 펴낸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가담 경로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면 2018년 2월~2019년 12월 서울경찰청 관할 경찰서에 검거돼 조사받은 한국인 235명 중 30세 미만이 77%였다. 대부분이 ‘송금 업무’ ‘고액 알바’ 등 문구에 흔들려 범죄에 연루된 청년들이었다.

보이스피싱 일당은 신뢰를 미끼로 쓴다. 중앙일보가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에 검거된 한 미끼문자 발송업체의 문자 발신내역 1532건(올해 8~10월)을 입수해 유형을 분석했더니, 대출을 유도하는 미끼문자는 모두 제도권 은행과 정부지원자금을 사칭하고 있었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미끼 문자에 등장하는 금융기관은 우리은행(244건), NH농협(215건), 국민은행(215건), 신한은행(207건), IBK기업은행(192건) 등 1금융권이 많았고 카카오뱅크(79건) 등 인터넷 은행도 있었다. 공통으로 ‘정부 지원’이란 문구를 쓰면서 ‘긴급생활안정자금’ ‘서민긴급대출’ ‘고용안정자금’이라고 홍보하며 피해자를 안심시켰다. 정부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희망회복자금(245건)’, ‘버팀목자금플러스(189건)’, 저소득·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새희망홀씨(110건)’ 등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보이스피싱 자금 전달까지 걸린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자금 전달까지 걸린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금융기관의 기술적 허점에 대한 피해자들의 분노도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박모(53)씨는 딸에게서 “휴대전화가 고장 나 임시 폰을 사야 한다”며 신분증 사진과 계좌 비밀번호 4자리를 요구받고 보내줬다가 1억5000만원의 피해를 봤다. 은행 측은 “스마트폰의 카메라 성능이 좋아져 보안 프로그램이 신분증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 신분증 유출을 조심해달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박씨는 은행이 비대면 금융 거래 과정에서 본인 확인을 소홀히 해 금융실명법과 전자금융거래법을 어겼다고 보고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엄마 신분증 사진 좀” 가족 사칭도 여전  

보이스피싱 추가 피해 여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추가 피해 여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젠 고전이 된 ‘김민수 검사’ 등 검찰이나, 금융기관, 가족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범죄도 계속되고 있다. 김민수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420만원을 빼앗겨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들(당시 28세)의 어머니 정은재(55)씨는 지금도 아들을 사칭하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고 했다. 경찰청은 올해 연말 보이스피싱 피해금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지난해(7000억원)보다 많을 것으로 예측한다.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가 지난해 국내에서 올린 매출(7162억)을 뛰어넘을 것이란 얘기다.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우려도 크다. 중앙일보 취재팀이 보이스피싱예방협회와 공동으로 한 달간(10월 28일~11월 28일) 보이스피싱 피해자 6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두려움’ ‘분노’ ‘죄책감’ 등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비율은 76.2%(48명)에 달했다. 불면증을 겪고 있거나(63.5%·40명),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25.4%·16명)도 많았다.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해 봤다는 답변은 6.3%(4명)였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금전적 구제가 되더라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큐알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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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피해 규모가 7000억원을 넘긴 보이스피싱의 실상과 수사 현황, 대책을 담은 기획 시리즈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는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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