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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공부량 많은 ‘내외산소’ 전공의 수련기간 짧아진 사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6)

입시의 계절이다. 누군가에게는 춥고 가혹한 시기다. 학생뿐 아니라 대학도 마찬가지. 요새는 많은 학교가 신입생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 인구가 줄어서다. 존폐를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교수의 가장 큰 업무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학생을 구해오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지방의 경쟁력 부족한 학교는 겨우내 학생의 선택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칠 테지만,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병원도 입시의 계절이다. 인턴과 전공의를 선발해야 한다. 여기도 다를 바 없다. 위험도 낮고 조금이라도 더 편하며 돈을 잘 버는 과는 뒷짐만 지고 있어도 많은 의사가 몰려든다. 경쟁이 벌어진다. 힘들고 보상이 적으며 소송이 잦은 과는 그 반대다. 지원자가 없다. 소위 말하는 기피과다. 환자를 살리고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는 곳은 여기라고 구구절절 가슴에 호소해보지만, 백날 노력해도 지원자는 턱없이 모자라다.

입시를 앞둔 학생은 미래 전망, 경제적 예상, 현재의 유행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학교의 네임밸류까지 모든 걸 고려해 진로를 결정한다. “당신을 진짜로 필요로 하는 곳은 지방이고, 돈이 안 되고 몸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적성은 이것이다.” 이런 제안에 순순히 응하는 바보 같은 학생은 없다.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울대를 쓸 거고, 그게 아니라면 인서울을 갈 것이다. 백날 꼬드겨도 지방소재 비인기 학과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지방에서 기피과를 하느니 재수를 해서라도 서울에서 잘 나가는 과를 전공하고 싶어 한다.

입시를 앞둔 학생은 미래 전망, 경제적 예상, 현재의 유행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학교의 네임밸류까지 모든 걸 고려해 진로를 결정한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사진 중앙DB]

입시를 앞둔 학생은 미래 전망, 경제적 예상, 현재의 유행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학교의 네임밸류까지 모든 걸 고려해 진로를 결정한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사진 중앙DB]

나는 지방의 응급의학 교수다. 그래서 언제나 을의 입장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지원자 중에 돈보다 생명을 택하는 허세 가득한 이들이 하나라도 더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래도 최근 몇 년간 응급의학과는 전국적으로 얼추 정원을 채웠다. 감지덕지했다. 오랜 세월 정원의 절반도 채우기 힘들었으니까. 그렇다고 응급의학에 뭔가 호재가 있었던 건 아니다. 비결은 따로 없다. 그저 남들이(다른 과) 망했기 때문이다. 특히 내과의 몰락이 컸다. 우수한 의사를 싹쓸이해 가던 내과가 수년 전 미달로 돌아섰다. 진짜 의사 소리를 들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전통의 강호 내과가, 재수해서라도 지원하던 자부심 넘치던 내과가, 미안한 표현이지만 쫄딱 망했다.

필수 의료가 고사 위기라는 말은 누구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지만, 학생들이 전공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증명해내고 있다. 요새는 내과 진료가 불가능한 응급실이 많다. 내과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많은 중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 떠돌아다니고 있다. 상상도 못 했다. 의사라면 누구나 가장 중요한 과라고 인정했던 내과가 이런 신세가 될 거라곤.

이렇게 내과의 인기가 떨어진 덕에 몇몇 다른 전공이 수혜를 입었다. 가장 많은 TO를 차지하던 내과 지원자들이 시장에 풀려났다. 덕분에 내과보다 먼저 망했던, 그래서 해마다 미달에 허덕이던 외과계나 응급의학에 숨통이 잠깐 트였다. 그렇다고 기쁘지는 않다. 내년에는 다시 내과가 간신히 정원을 채울 예정이고, 응급의학과는 대거 미달 예정이다.

생명을 주로 다루는 의료의 핵심 4개 전공을 메이저라고 한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다. 이 중엔 멀쩡한 게 없다. 내과와 외과는 최근 수련 기간을 4년에서 3년으로 줄였다. 소아청소년과도 내년부터 3년제로 전환된다. 3년이면 수련이 충분해서가 아니고, 힘든 레지던트 과정을 1년 줄여줄 테니 제발 전공으로 선택 좀 해달라는 하소연이다. 소아청소년과의 내년 전공의 지원율은 30%도 되지 않는다. 그냥 다 망했다. 메이저란 수식어가 민망하다. 공부량이 제일 많다고 의사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내외산소가 수련 기간이 가장 짧아진 아이러니의 시대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대학병원마다 전공의를 선발한다. 돈보다 생명을 택하는 허세 가득한 학생이 하나라도 더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 Pxhere]

매년 이맘때쯤이면 대학병원마다 전공의를 선발한다. 돈보다 생명을 택하는 허세 가득한 학생이 하나라도 더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 Pxhere]

젊은 세대는 유행에 민감하고 셈이 빠르다. 선배 의사들은 패배감과 울분이 속에 가득하다. 의사 커뮤니티엔 하루에도 십수 개씩 기피 과를 선택하지 말라는 글이 올라온다. 남들이 기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전공에 비해 버는 돈은 절반도 안 되는데, 사람 살리다 실수하면 소송에 시달리고, CCTV로 감시받을 만큼 존경도 못 받는 전공을 뭐하러 선택하냐는 거다. 젊은 치기에 환자를 살리겠다고 기피과를 선택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는 선배들의 간증이 쏟아진다.

혹자는 의사 수를 늘리면 된다는데, 그래 봐야 인기과 의사만 늘 뿐. 내 곁까지 흘러오는 의사는 한 줌도 안 된다. 가난을 해결하는 법은 낙수효과뿐이란 주장처럼 그저 공허할 따름이다. 혹자는 입학 때 전공과목을 정하자는데, 그게 가능했으면 중학교 입학 때 6년 후 들어갈 대학과 전공을 정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도 입학 후 5년은 지나야 전공을 정하니까.

우리는 다른 동료 의사들보다 수입도 적고 잠도 못 자고 콜에 시달리고 일도 힘든데, 이런 상대적 박탈감을 사람들이 공감해 줄 턱이 없다. “어차피 의사니, 너도 돈 잘 벌잖아”라는 비아냥만 듣지 않음 다행일 테지. 알고 있다. 배부른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거란 걸. 아무튼 나는 사람을 살린다는 보람 때문에 기피과 전공을 선택했다. 툭하면 소송이 걸릴 만큼 위험한 의료행위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 요새는 코로나 19를 몸으로 때워내는 역할도 함께하고 있다. 한 줌 가치도 없지만 얄팍한 자부심 하나를 붙들고 살고 있다. 하지만 매년 겨울이면 너무 힘들다. 인기과 찾아 뒤돌아 떠나가는 후배 의사들을 볼 때마다, 이 사회가 너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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