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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폰만 관리, 월400만원 번다"···주부·학생 노리는 '꿀알바'의 덫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력 20년 차 수사관의 입이 벌어졌다. 지난 7월 보이스피싱 범행에 쓰이는 중계기를 적발하던 때의 일이다. 서울은평경찰서 지능팀이 중계기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경남 창원의 한 주택가를 급습했는데, 유심칩이 잔뜩 꽂혀있어야 할 중계기 대신 스마트폰 수십 대에서 동시에 전화가 걸리고 있었다. 담당 수사관은 “심박스(SIM Box)로 불리는 중계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화기가 있었다. ‘다른 기기에서 전화·문자하기’ 기능을 이용해 전화기가 중계기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스마트폰 오래 썼는데, 그 기능은 그때 처음 알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서울 은평경찰서 제공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서울 은평경찰서 제공

보이스피싱 조직은 경찰의 단속을 따돌리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 전화번호 앞자리를 070에서 010으로 변작해주는 중계기 단속이 잦아지자 아예 스마트폰을 가져다가 놓고 중계기 대용품으로 활용한 것이다.

중계기, CMC…진화하는 수법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보이스피싱 범행 수법을 알아야 한다. 중계기는 대포통장, 대포폰, 불법 환전 등과 함께 보이스피싱 4대 범행수단으로 불린다.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은 중국 등 해외에 있는 콜센터에서 사용료가 저렴한 070 인터넷 전화로 범행에 나선다. 그러나 070보다는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대출 사기에 대한 의심을 적게 살 수 있고 그 역할을 중계기가 수행한다. 그러나 경찰이 중계기 전파탐지기를 개발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에 따르면 올해 초 경찰이 파악한 중계기는 전국에 300여 대로 추정됐으나 12월 20여대 수준으로 줄었다.

동일한 제조사의 태블릿 PC(왼쪽)와 스마트폰(오른쪽)에서 설정 가능한 '다른 기기에서 전화ㆍ문자하기', 일명 CMC(Call&Message Continuity) 기능.

동일한 제조사의 태블릿 PC(왼쪽)와 스마트폰(오른쪽)에서 설정 가능한 '다른 기기에서 전화ㆍ문자하기', 일명 CMC(Call&Message Continuity) 기능.

경찰에 적발된 발신번호 변작 중계. 사진 부산경찰청

경찰에 적발된 발신번호 변작 중계. 사진 부산경찰청

보이스피싱 조직 입장에서도 CMC는 ‘남는 장사’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해외에서 제조해 들여오는 중계기 1대 값은 200만~300만원 선이다. 이에 비해 CMC 수법에 이용되는 중고 스마트폰은 한 대당 15만원 정도다. 경찰 관계자는 “중계기는 단속에 걸리면 연동된 모든 시스템이 닫히지만, 스마트폰은 압수되면 다른 스마트폰으로 다시 기존 계정에 로그인하면 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한대 관리하고 주 5만원 ‘꿀알바’

중계기나 스마트폰을 관리해야 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중계기 관리책으로는 주부나 학생 등이 걸려들고 있다. 온라인 구직사이트에서 ‘스마트폰 관리 업무’‘재택근무 가능’ 등이라는 문구로 이들을 꾀어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한 대당 관리비가 일주일 기준 5만원씩이라고 하니, 20대면 일주일에 100만원, 한 달 400만원 벌이인 셈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관리책으로 가담한 이들에게 “다른 사람이 통화하는 일이니까 휴대전화는 절대 직접 보면 안 된다” “위치확인 기능은 끄고 방해금지 모드를 켜놔라”는 등의 지시를 내린다.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서울 은평경찰서 제공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서울 은평경찰서 제공

휴대전화 제조사 측도 CMC 기능을 악용한 범죄 노출성을 인지하고 차단법을 강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경찰청과 업무협약을 맺고 해외에서 접속하는 CMC를 차단하는 방안 등을 연구하고 있다. 태블릿PC에서 CMC 기능을 쓸 수 없도록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는 식이다. 삼성전자 측은 “보이스피싱 발생 우려가 큰 복수 국가에서 해당 기능을 사용할 수 없도록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해나가고 있다”며 “최신 운영체제는 업데이트를 완료했고, 구형 운영체제도 내년 초까지는 업데이트를 완료할 예정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업데이트를 진행해서 범죄를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계정 즉각 차단 조치도 검토해야

경찰은 범죄에 이용되는 계정이 발견될 경우 즉각 차단할 수 있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당 휴대전화의 GPS 위치 정보 압수수색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예전엔 전화만 이용하던 것에서 지금은 중계기, 가로채기 앱, 모바일 메신저 등 수법이 다양하고 복잡해졌다”며 “우선 보이스피싱 수단을 단속하고 제거하는 게 필요하다. 그 이후엔 외국과 협조를 통해 내년부터는 주범을 본격적으로 검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역할분담

크게 6가지 역할로 나뉘어 움직인다. ①중국, 필리핀 등 해외에 거점을 두고 사무실 운영과 데이터베이스 관리, 수익 분배 등을 책임지는 총책, ②은행 직원 또는 검사ㆍ수사관을 사칭하여 전화를 거는 콜센터, ③대포통장을 모집, 관리하는 대포통장 모집책, ④국내에서 피해금을 건네받아 무통장 송금하는 현금수거책, ⑤피해금이 입금된 대포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해외로 송금하는 송금책, ⑥전화번호를 변작하는 중계기를 관리하는 중계소 관리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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