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강주안의 시선

경찰도 은행도 농락하는 그들

중앙일보

입력 2021.12.13 00:29

업데이트 2021.12.13 09:21

지면보기

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보이스피싱범이 알바 지망생 A씨를 속이는 카톡 내용 일부 재구성.

보이스피싱범이 알바 지망생 A씨를 속이는 카톡 내용 일부 재구성.

지난 9일 또 한 명의 청년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0년 가까이 우울증 치료를 받아온 20대 여성 A씨다. 보이스피싱 일당이라는 죄목이다.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보이스피싱 범죄자에게 속아 아르바이트(알바)인 줄만 알았다”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선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피해자들에게 돈을 물어주고 합의하느라 대부분 피해자보다 훨씬 큰 금전적 손해를 봤다.

A씨는 ‘마스크 사기’에 연루됐다. 품귀 현상이 심각할 때 범인들은 포털 사이트에 “마스크를 판다”고 올려 약사 등을 속였다. A씨 계좌로 마스크값을 보내게 했다. 범인들은 A씨에게 "쇼핑몰 관리 업무"라고 거짓말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알바 이외 사회 경험이 없는 A씨는 그들에겐 너무 쉬운 ‘먹잇감’이었다. 대표적인 알바 소개 사이트를 통해 접근하자 바로 낚였다.

위조증명 내자 한도 늘려준 은행

요즘 주변엔 A씨 같은 청년이 넘쳐난다. 한해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3만 명이 넘지만, 당국의 대처는 허술하다. A씨 사건만 봐도 최소한 두 번 차단할 기회가 있었다. A씨가 알바를 시작한 직후 은행에서 A씨 계좌가 경찰에 신고됐다고 통보했다. 만약 이때 경찰이 A씨를 찾아갔다면 ‘마스크 사기’는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경쟁사에서 장난치는 거죠. 아무 일 없을 거예요"라는 보이스피싱범의 말처럼 A씨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체 한도를 늘리라는 지시에 범인이 보내 준 위조 재직증명서를 들고 은행에 갔을 때도 차단의 기회였다. "회사 전화번호가 있어야 한다"며 처리를 보류한 직원은 다음 날 범인이 A씨에게 불러 준 전화번호를 내자 바로 통과시켰다.

‘가짜 검사’에 속아 넘어간 경찰

경기도에선 보이스피싱범의 전화를 받은 여성이 인근 경찰 지구대에 찾아갔으나 전화를 건네받은 경찰관이 "서울중앙지검 홍○○ 검사예요"라는 범인 말에 속아 넘어가 600만원의 피해를 막지 못한 일도 벌어졌다.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예요"라는 전화에 420만원을 빼앗기고 극단 선택을 한 28세 김후빈씨의 비극은 많은 사람을 울렸다. 경찰은 ‘김민수 검사(이하 가짜 검사)’를 검거했다. ‘가짜 검사’에게 화살이 집중됐다. 그러나 이 범죄에서 ‘가짜 검사’의 역할은 15%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풍부한 경험으로 계산한 수익금 배당 비율이다.

 ‘가짜 검사’는 조직에서 ‘콜센터 직원’으로 불렸다. 목소리 연기자에 가깝다. 그를 고용한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계보도를 따라가면 위에 팀장이 있고 그 상부에 범행 설계자인 총책이 나온다. ‘가짜 검사’ 전 단계엔 가짜 수사관이 있고 뒤에는 가짜 금감원 직원이 대기 중이다. 김후빈씨의 전화번호를 입수해서 콜센터에 나눠준 사람, 대본을 작성해 ‘가짜 검사’에게 가르친 사람, 뜯어낸 돈을 대포통장으로 관리하는 조직, 암호화폐로 바꿔 중국으로 보내는 팀 등이 85%를 차지한다. 이들을 발본색원하지 못하는 수사는 무의미하다.

중국 공안의 협력을 끌어내야 한다. ‘가짜 검사’가 일했던 M파 조직원들이 주민 신고로 모두 공안에 잡혀갔으나 조직원이 연줄을 동원해 곧바로 풀려났다는 진술이 여러 명에게서 나왔다. 우리 검경이 중국 공안과 공조했다면 일망타진할 기회였다. 김후빈씨의 비보도 없었을 것이다. 조직원 중 일부는 한국에 들어와 수감된 동료를 여러 차례 면회했을 만큼 대담했다.

‘가짜 검사’가 잡힌 건 M파가 조직을 이탈하려는 한국인을 응징한다며 일부 콜센터 직원을 공안에 ‘던진’(넘긴) 덕택이라고 한다. 중국서 추방된 이들이 공항에서 체포됐고 먼저 귀국했던 콜센터 직원 신상이 차례로 드러났다. 뒤늦게서야 붙잡힌 ‘가짜 검사’는 조사에서 "(김후빈씨) 비극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곧바로 귀국했다"고 털어놨다. 우리 수사 당국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저 멀리서 용의자를 던져주기만 기다려야 하는가.

보이스피싱 낚인 알바생만 처벌 

검찰과 경찰이 알바생들을 재판에 넘긴 서류들을 보면 이들이 마치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요 인물이라도 되는 양 침소봉대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범죄 조직은 이들을 범행 도구로 써먹고 우리 정부는 이들을 보이스피싱 예방 도구로 써먹는다"(이병찬 변호사)는 말이 딱 맞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말’이라고 비하하는 알바생 1만 명을 감옥에 보내도 진짜 범인들을 방치하는 한 비극은 확대 재생산될 뿐이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성공한 순간 총책은 "김민수 2000(만원) 콜!"하고 외친다. 일제히 환호와 박수가 터진다. 비극의 그 날도 "김민수 420 콜!"을 소리쳤을 터다. 지금도 중국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환호가 들리지 않는가.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관련기사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