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②'김민수 검사'에 子 숨진지 2년…'엄마 나야' 끔찍문자 계속 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엄마에게 한마디만 했더라면….”
맏아들의 생전 모습을 얘기하다 엄마는 한참을 허공만 바라봤다. 엄마의 메신저 대화명은 ‘울 아들 D+688’이었다. “아들을 잊지 않기 위해 날짜를 기록해 둔 것”이라고 했다. 첫째 아들 김후빈(당시 28세)씨는 지난해 설 명절을 앞두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휴대전화에선 “금융 범죄에 연루됐다”며 송금을 요구하는 남성과 울먹이는 후빈씨의 목소리가 담긴 통화녹음이 발견됐다. 정작 후빈씨는 삶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본인이 보이스피싱 피해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실수로 범죄자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휴대전화에 유서를 남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2년여, 아들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엄마 정은재(55)씨의 싸움은 진행 중이다.

연구직 공무원을 꿈꾸던 故 김후빈씨는 늘 자신보다 엄마와 동생이 먼저였다고 한다. 사진 정은재씨 제공

연구직 공무원을 꿈꾸던 故 김후빈씨는 늘 자신보다 엄마와 동생이 먼저였다고 한다. 사진 정은재씨 제공

‘그놈 목소리’에 무너진 20대 청춘

후빈씨는 늘 엄마와 동생이 먼저였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해 꼭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6살 터울 동생의 출퇴근길을 책임졌다. 한때 코미디언을 꿈꿀 정도로 유쾌했던 후빈씨 덕에 가정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그는 ‘기둥’이었다.

화목했던 가정은 지난해 1월 20일 ‘그놈’의 전화에 한순간에 무너졌다.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발신인은 법률용어를 쏟아내며 후빈씨를 압박했다. 배터리 부족으로 통화가 끊어지자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공개 수배하겠다”고 윽박질렀다. 11시간에 걸친 협박에 후빈씨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시키는 대로 은행에서 420만원을 찾은 뒤 전북 순창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서울 마포구의 한 주민센터 택배함에 돈을 넣은 뒤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며 답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챙긴 뒤 자취를 감췄다. 연구직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20대 청춘은 낙담했고 그렇게 꿈을 잃었다.

엄마는 아들이 남긴 육성 유언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왔다. 둘째는 형을 잃은 충격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하지만, 엄마는 슬픔에 주저앉지만은 않았다. 있는 힘껏 아들의 사연을 알리기로 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수록 범인이 설 자리가 줄어들 거란 생각에서다. 엄마에겐 “언젠간 꼭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경찰은 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휴대전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단서를 잡았다. 검사 사칭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흐릿하게 찍힌 단체 사진이었다. 경찰은 특정 시점에 한국과 중국 청도를 오간 명단과 여권 사진을 추리면서 용의자를 좁혀나갔다. 범행을 저지른 일당을 차례로 검거해나갔고 마침내 경기도 수원 동거녀 집에 숨어 있던 ‘가짜 김민수 검사’ 서모(47)씨를 체포했다. 후빈씨가 삶을 내려놓은 지 1년 3개월 만이었다. 서씨는 다른 조직원과 함께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돼 법정에 섰다.

한때 코미디언을 꿈꿀 정도로 유쾌했던 故후빈씨(오른쪽) 덕에 가정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정은재씨 제공

한때 코미디언을 꿈꿀 정도로 유쾌했던 故후빈씨(오른쪽) 덕에 가정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정은재씨 제공

“보이스피싱 범죄 형량 높여야”

엄마는 재판이 열리는 날마다 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법정 맨 앞자리를 지켰다. 11시간 동안 아들을 괴롭히고 죽게 한 가해자가 후빈씨 얼굴을 꼭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피고인석을 향해 “평생 사죄하면서 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서씨는 목을 빳빳이 든 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정씨의 주장이다. 도리어 “중학생 아들이 있으니 제가 감옥 가면 안 된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모습에 정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난 9월 1심 선고일, 엄마는 또 한 번 좌절했다. 법원이 서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면서다. 구형량의 절반보다 적었다. 서씨 측이 판결에 불복하면서 고통의 시간이 늘어났다. 지난달 15일 항소심 첫 재판을 마치고 나온 뒤 정씨는 보이스피싱 범죄의 처벌 수위가 약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람을 죽게 했으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가해자들은 형을 살고 나오면 똑같은 범행을 저지를 게 분명하다”고 했다. 정씨는 서씨 등이 죗값을 제대로 치를 때까지 싸움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후빈씨가 떠났지만 정씨에겐 후빈씨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문자가 아직도 온다고 한다. 심석용 기자

후빈씨가 떠났지만 정씨에겐 후빈씨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문자가 아직도 온다고 한다. 심석용 기자

“고통 잊고 하늘에서 편히 쉬길”

정씨는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범인을 잡은 뒤 뒤늦게 듣게 된 아들의 육성 유언에 대한 답장이었다. 아들이 이제는 고통을 잊고 편히 쉬었으면 하는 절절한 소망이 담긴 작별 인사였다. “너 같은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안 되니까 그동안 엄마가 많이 애썼어. 동생 잘 돌보고 엄마도 언젠가는 우리 아들한테 갈 거니까 그때까지 편하게 지내면서 기다려줘. 사랑해 아들….”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7000억원이 넘었습니다. 테슬라가 한국에서 올린 매출과 비슷합니다. 언택트 사회의 고도화에 맞춰 보이스피싱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을 맹신한 피해자의 충격과 자책은 더 큽니다. 중앙일보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수사 기관 및 금융 당국 관계자들을 밀착 취재해 14회에 걸친 기획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12월 13일(월)부터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