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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우익 공격도 끄떡없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신경 쓴 단 한명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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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꼬마소녀 메이와 토토로의 첫 조우. [Studio Ghibli]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꼬마소녀 메이와 토토로의 첫 조우. [Studio Ghibli]

고양이 버스를 타고 이웃의 토토로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 가끔 하시죠. 21세기형 인어공주 벼랑 위의 포뇨와 소스케, 허세 마법사 하울과 속깊은 할머니 소녀 소피의 사랑을 응원한 적도 당연히 있으실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팬이라면 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공동 창업한 미야자키 감독은 1941년생, 만 80세입니다. 1997년에도 2013년에도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미야자키 감독이 이번엔 진짜 끝이라며 지난달, 마지막 작품에 대한 힌트를 내놓았습니다. 뉴욕타임스(NYT)와 진행한 인터뷰에서죠. NYT는 별도로 발간하는 T매거진에 최근 이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인터뷰한 기자도 미야자키 감독의 팬이 틀림 없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에 대해 “20세기 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단언하고, 팬데믹으로 인해 화상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스튜디오 지브리 측의 제의에 대해 “컴퓨터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때를 기다렸다고도 설명하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바람이 분다' 개봉 당시인 2013년의 사진. [중앙포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바람이 분다' 개봉 당시인 2013년의 사진. [중앙포토]

미야자키 감독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되도록 기자회견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NYT와 함께, 도쿄(東京) 교외 미야자키 감독의 작업실 문을 노크해보실까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감독은 흰 색 작업용 에이프런을 두르고, 60년 이상 애용해온 연필을 쥐고 세븐스타 담배를 언제든 피울 수 있게 준비해놓은 채 기자를 맞았다고 합니다. NYT는 “미야자키 감독은 항상 연필을 이용해 직접 그림을 그려왔고,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해왔다”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전했습니다. ‘이번’이라는 건 미야자키 감독의 은퇴작입니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지난 9일, “곧 공개할 것”이라고 발표한 이 작품은 1937년 소설이 원작입니다. 소설의 제목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郞)의 작품으로, 10대 소년이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갖는 의문을 정면으로 마주한 무게감 있는 소설입니다.

미국 신문인만큼, NYT는 자국의 디즈니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비교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미야자키는 디즈니 작품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1988년의 한 강의에선 “디즈니 작품을 보면 그들이 관객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다”고 울분을 터뜨린 일도 있죠. 그는 NYT의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요.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 신이 아닙니다.” 선악을 명확히 가르고 권선징악이 뚜렷한 주제로 등장하곤 하는 디즈니를 우회 비판한 셈이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미야자키 하야오, ⓒ 2001 Studio Ghibli NDDTM[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미야자키 하야오, ⓒ 2001 Studio Ghibli NDDTM[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중 하나는 반전(反戰)입니다. 41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군수 공장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어찌 보면 전쟁 덕에 먹고 살았던 가족의 둘째아들이 미야자키 감독이었습니다. 그 덕에 자신도 부유하게 자랐고, 일본 왕족과 부유층이 다니는 대학교 가쿠슈인(学習院)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됩니다. NYT는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가 전쟁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점과, 그에 대해 부끄러움도 죄스러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점 두 가지를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감독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부터가 그렇죠. 지브리는 지블리(Ghibli)의 일본식 발음인데, NYT에 따르면 리비아 사막의 열풍을 일컫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정찰폭격기 모델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전쟁엔 반대했지만 전쟁의 도구인 비행기엔 매료되었던 소년 미야자키의 면모가 그 이름에 녹아있는 셈입니다.

이 버스, 타고 싶습니다. [Studio Ghibli]

이 버스, 타고 싶습니다. [Studio Ghibli]

미야자키 감독은 일본의 일명 ‘보통국가화’, 즉 지금의 자위대가 아니라 정식 군대로 무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로 인해 일본 우익의 악플이나 악성 e메일 등 공격도 많이 받지만, 미야자키 감독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네요. 미야자키 감독은 컴퓨터를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01년 방한 당시 기자회견 중인 미야자키 감독. [중앙포토]

2001년 방한 당시 기자회견 중인 미야자키 감독. [중앙포토]

NYT는 “미야자키 감독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고,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전합니다. 그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입니다. ‘반딧불이의 묘’와 ‘가구야 공주’ 등의 작품으로도 유명하죠. 다카하타 감독은 2018년 별세했는데, 당시 미야자키 감독은 울먹이며 추도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야자키 감독은 다카하타 감독에 대해 “우리들은 힘껏 그때를 살았던 것”이라며 “이제 나에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추모했습니다. 생전 다카하타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에 대해 “싸우기는 것도, 우는 것도 잘하고, 놀기도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재능을 인정받길 기대하는 데 그 기대가 깨지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라고 애정을 담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미야자키 하야오, ⓒ1989 가노도 에이코 스튜디오 지브리 [사진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미야자키 하야오, ⓒ1989 가노도 에이코 스튜디오 지브리 [사진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미야자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작품 제목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NYT 기자의 마지막 질문은 이랬습니다.
“미야자키 감독님, 영화 제목에 대한 본인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고 그는 먼저 세븐스타에 불을 붙였고, 곧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몰라요.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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