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선데이 칼럼]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66호 35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영화와 드라마를 보지 않은 지 좀 됐다. 화제의 영화는 개봉 전에 예약까지 하며 기다릴 정도로 극성스러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전설의 한순간처럼 느껴질 정도다. 최근 10여 년 동안 영화관에 간 게 서너 번은 될까. 아마도 오래전 영화관에서 당시 꽤 화제가 됐던 한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와 버린 후부터일 거다.

당시 미디어마다 ‘폭력의 미학’이라며 칭송했던 영화. 하지만 나는 그 영화의 ‘지나친 폭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 십수 명이 달려들어 곤죽이 되도록 때리고, 사람에게 쇠몽둥이와 각목을 들이대고, 트럭이 덮치고…. 이미 수십 번은 죽였음 직한 폭력이 한 사람을 향하는 장면들은 참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폭행을 당한 사람이 다음날 다시 뛰어다녔다. 주인공은 죽지 않으므로. 물론 창작 세계의 비현실성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전쟁과 칼싸움 같은 대결 구도가 아닌 일방적이고도 잔혹한 폭행이 어째서 미학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알았다. 이 시대는 그런 잔혹함에 열광한다는 것을.

죽을 줄 모르고 때렸다는 부모들
한 사람을 표적 이지메하는 사회
‘폭력 미학’에 열광하는 대중문화
폭력 시대 대처 방법 찾아야 한다

나의 시대에 대한 ‘몰이해’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 사람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알기 때문이었을 거다. 경찰출입 사건기자 시절 새벽마다 했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그 전날 일어난 변사 사건을 챙기는 것이었다. 변사 사건은 없는 날이 없었다. 길 가다 쓰러져서, 추운 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친구들과 용기 내기를 한다며 한강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고, 사소한 다툼에 밀쳤는데 넘어져 죽기도 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쉽게 죽었다.

그런가 하면 뺨 한 대 맞고 목뼈가 틀어진 사람도 있었고, 추돌 사고에 떨어져 나간 뼈가 신경을 찔러 수술을 받고 치료하느라 생업을 접고 1년 넘게 고생한 사람도 보았다. 사람의 육체는 그렇게 약하다. 각목이나 쇠몽둥이뿐 아니라 사람의 주먹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주·조연을 구분할 수 없는 현실에선 특정한 누구만 피해서 죽음과 위험이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건 모두에게 공평하다.

선데이칼럼 12/11

선데이칼럼 12/11

“죽을 줄 모르고 때렸다.” 최근 세 살짜리 의붓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계모의 말이다. 다섯 살 아이의 손발을 묶어 놓고 목검으로 수차례 때려죽인 계부, 아홉 살 아이를 여행 가방에 가두고 아이들과 함께 뛰어올라 밟은 계모… 장기가 파열될 정도로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이들은 모두 훈육을 한 것이었으며,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선 세 개의 사례만 들었지만 이런 일들은 요즘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흔하게 일어난다. 폭력을 훈육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일까. 사람의 육체는 심하게 부딪쳐도 부서질 정도로 약하고, 맞으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요즘은 폭력 치사·살인도 너무 빈번하다. 여자친구를 때려죽이고, 헤어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며 끝내 살해한 사건이 최근 잇따랐다. 자신의 분노를 살인으로 푸는 사람들. 친구를 감금하고 죽을 때까지 폭행한 청소년들도 죽을 줄은 몰랐단다. 그런가 하면 아예 여자친구 사망보험을 들어 놓고 보험금을 노려 살인을 모의한 청소년들은 ‘멋지게 살고 싶어서’ 그랬단다.

무감각한 폭력, 무심한 살인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사회. 이 글의 시작이 영화와 드라마였다고, 이런 현상들이 영화·드라마·게임 등을 모방해서 일어났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성공한 상업적 대중문화 상품들은 시대의 숨겨진 욕망을 읽어 그 욕망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관객의 감각에 아부하는 것들이 많다. 폭력과 음모가 난무하는 대중문화 상품은 그저 이 시대의 산물이고, 최고의 부가 가치를 올리며 승승장구한다.

폭력의 미학이 칭송받고, 게다가 대중들이 살인이나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폭력을 즐길 수 있는 ‘폭력 놀이’가 흔하디흔한 시대다. 몇몇 스타급 빅마우스와 일부 언론은 주기적으로 한 사람을 정해 ‘표적 이지메’를 하며 명성을 쌓고, 대중들은 ‘그자를 처단하라’고 부추기는 각종 혐오 댓글로 이 폭력적 시대의 ‘유지와 발전’에 힘쓴다. 이런 폭력적 감성에 충만한 선동글을 보고 있자면 죽을 때까지 때려 놓고 죽을 줄 몰랐다고 하는 자들이 오버랩된다.

하다 하다 이제는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어린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에도 거침없이 나선다. 몇 년 전에 ‘11살 소년 인권도 못 지키는 사회가 윤리를 논할 자격이 있나’〈2013년 9월 16일자, 분수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는 또 정략적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던지고 이전투구하는 역겨운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타인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금도(襟度)가 있는 사회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입으로든 물리력으로든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어선 안 된다는 ‘기본’ 정도만이라도 공감받으면 좋겠다.

우리는 알지 않나. 삶이라는 게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지, 똑 떨어지는 선행만 하며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중들도 남들을 비난하려고 곤두세웠던 손가락을 거두어들이고, 대중문화계도 언론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이 사람 잡는 폭력의 시대를, 함께 사는 세상으로 바꾸는 ‘슬기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