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싶은건 다해본 조영남, 그 입밖으로 나온 충격 "화천대유"

중앙일보

입력 2021.12.11 00:25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41〉가수 50주년 음반 신곡

지난주 2021년 12월 4일 밤 11시에 방송된 MBN 텔레비전의 대표 프로그램인 ‘동치미’에 출연했다. ‘동치미’는 동감하고 치유하는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아름다운(美) 사람들이란다. ‘동치미’의 PD 정혜은은 거기에 고정 출연하는 유인경(전 경향신문 기자)과 함께 개인적으로 나의 여사친, 여자 사람 친구다(나는 그냥 여친으로 부르고 싶은데 이런 지면에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필히 여사친으로 칭해야 하는 관습이 심히 못마땅하다). 평소 친구처럼 가까운 정혜은이 ‘동치미’를 오랫동안 연출하는 동안에 있었던 얘기들을 일일이 기록한 책 한 권( 『인생, 그래도 좋다 좋아』)을 전해주면서 이번에 연말 특집 ‘동치미’를 기획하는데 출연해줄 수 있겠느냐 물어왔고 나는 코로나 시대에 시간이 남아돌아 선뜻 그러마 하고 출연을 약속, 하루 녹화를 찍고 그게 방송에 나간 것이다.

“이만하면 내 인생 화천대유”

1970년대 초반 앨범 재킷. ‘딜라일라’와 ‘물레방아 인생’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조영남]

1970년대 초반 앨범 재킷. ‘딜라일라’와 ‘물레방아 인생’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조영남]

본 방송이 나가는 4일 토요일 밤 11시. 나는 자칭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변사 개그맨 최영준과 함께 그가 만들었다는 노래 ‘이태리 타올’이라는 곡을 놓고 이래저래 손을 본다고 ‘동치미’ 출연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넘어갔다. 다음날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걸려와 그때서야 뒤늦게 ‘아하! 내가 깜빡했구나’ 하게 됐다. 내가 출연한 TV 프로그램이 껄렁하면 보통 전화가 한 통도 안 걸려오고 좀 괜찮으면 몇 통씩 걸려오는 게 상례다. 그러니까 이번엔 여러 통의 전화를 받은 것으로 보아 꽤 괜찮았다고 자평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동치미’는 여러 명의 이름난 연예인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그날그날 정한 주제에 맞는 잡다한 얘기들로 풀어가는 형식의 말하자면 떼거리 토크쇼인 셈이다. 전화의 반응에 의하면 나의 하이라이트는 내가 방송에서 처음 발표한 ‘삼팔광땡’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던 모양이다. 그 노래는 이번에 발매되는 나의 부끄러운 조영남 가수 50주년 기념 음반에 실린 신곡인데(나는 늙어 보인다는 이유로 ‘50주년’이란 말을 빼자고 했는데 그걸 넣어야 시선을 끈다는 이유 때문에 내 쪽에서 지고 말았다) 이 곡의 탄생이 꽤 재미있었다.

우선 이 노래는 한빈 작사에 그 유명한 ‘내 나이가 어때서’의 작곡가 정기수가 쓴 신곡 ‘삼팔광땡’이 원곡인데 녹음을 하는 중에 문득 나한테 웃기는 가사가 떠올라 원곡 작사 작곡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쪽의 가사까지 녹음을 마치게 되었고 정규 앨범에 끼워 넣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습게도 ‘삼팔광땡’ 한 곡에 두 가지 버전의 가사가 실리는 실험적인 꼴이 된 셈이다. 하여간 긴 토의 끝에 우린 두 곡을 다 싣기로 결정이 났고 나는 ‘동치미’에서 새로 만든 나의 ‘삼팔광땡’을 나의 어설픈 통기타 반주로 발표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앨범 선전(?)용으로 내놓고 선전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방송을 못 봤고 여기저기 걸려오는 전화의 내용은 이랬던 것 같다. 내가 말한다.

“나는 조용필이 ‘바운스’라는 노래를 발표했을 때나 나훈아가 ‘테스형’을 발표해서 요란법석을 떨 때 한쪽 구석에서 속칭 무지하게 쪽이 팔렸다. 야! 조영남. 다른 가수 조용필이나 나훈아가 신곡으로 떠들썩한데 너는 지금 뭐하고 있냐. 이런 식으로 추궁당하는 느낌이었고 꼭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난 또 자존심은 있어서 아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그들과 달리 자필로 일간지에 연재를 하는 중이다, 라고 위안을 삼지만 뭐 이런 거로는 영 대체 불가능한 묘한 열등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던 거다. 가수 생활이나 연예인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모든 가수 모든 연예인한테는 이런 속앓이가 늘 있기 마련이다.”

뭐 대충 이런 토를 달고 드디어 나도 겨우 노랠 한 곡 만들었는데, 부끄럽지만 소개를 하겠다 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삼팔광땡’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의 허접한 가사다.

1절.
손들어 보세요. 나와 보세요.
이미자와 노래해 본 사람
나와 보세요. 손들어 보세요.
패티김과 노래해 본 사람.
어허야 우리 인생 일장춘몽이요
어허야 우리 한 세상 한번 왔다 가는 소풍
이미자와 패티김과 노래도 해봤으니
이만하면 내 인생 삼팔광땡

2절.
손들어 보세요. 나와 보세요.
조용필과 노래해 본 사람
나와보세요 덤벼보세요
나훈아와 노래해 본 사람
어허야 우리 인생 일장춘몽이요

어허야 우리 한 세상 한번 왔다 가는 소풍

이미자와 패티김과 노래도 해봤으니

이만하면 내 인생 삼팔광땡
이만하면 내 인생 삼팔광땡
이만하면 내 인생 화천대유유우우우

조영남씨는 노래·그림·글쓰기 모두에서 자신의 인생이 화투의 삼팔광땡 패에 비교할 만하다고 했다. 그만큼 잘살았다는 것이다. 삼팔광땡 패 화투장을 활용해 지난해 제작한 작품. [사진 성승모]

조영남씨는 노래·그림·글쓰기 모두에서 자신의 인생이 화투의 삼팔광땡 패에 비교할 만하다고 했다. 그만큼 잘살았다는 것이다. 삼팔광땡 패 화투장을 활용해 지난해 제작한 작품. [사진 성승모]

그렇다. 내 인생은 삼팔광땡이었다. 화투판에선 삼팔광땡이 제일 높은 끗발이란다. 내 인생이 그랬다. 우선 나는 가수다. 중앙SUNDAY 애독자님들이여. 한 번 생각해보시라! 세상에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이미자 패티김 조용필 나훈아와 함께 노래해본 가수가 조영남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나밖엔 없다. 그럼 나는 왜 그런 특이한 특별난 가수가 되었는가. 좋은 질문이다. 대답하겠다.

나는 그네들과는 애당초 시작부터가 달랐다. 어떻게 달랐느냐. 이미자가 ‘헤이일 수 없이 수많은 바암을’ 하고 패티김이 ‘어쩌다 새앵가기 나아아겠지이’ 하고 조용필이 ‘꽃피이이는 동백서엄에에’ 하고 나훈아가 ‘사라앙이 무어냐고 무르으신다아아면’ 하며 소위 대표 신곡을 부를 때 나 조영남은 어땠는가. 조영남은 ‘아이 쏘더 라?? 온더 나?? 댓아이 패스바이허윈도우우(I saw the light on the night that I passed by her window)’ 이렇게 나갔다. 무슨 아프리카 주문도 아니고 이상한 교회 방언도 아닌 생판 못 알아듣는 외국말을 ?X라?X라 해대면서 그네들과 똑같은 데뷔곡이라고 우겨댔다. 노래 제목은 ‘딜라일라’였지만 그걸 처음 부를 때는 그냥 외국 여자이름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차츰 알게 된다. ‘딜라일라’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삼손 장군을 배반한 여인(머리카락 자름)에게 복수를 한다는 전설적인 스토리의 외국 노래다.

그후로도 나는 이미자 패티김 조용필 나훈아 못지않게(?) 줄줄이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내 고향 충청도’ ‘물레방아 인생’ ‘고향의 푸른 잔디’ ‘내 생애 단 한번만’, 장례식용으로 부르게 된 ‘모란동백’, 남의 노래지만 내 곡처럼 써먹는 ‘그대 그리고 나’, 메인 가수 이동원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내가 훨씬 더 많이 부르게 될 정지용 시에 김희갑 작곡의 ‘향수’ 그리고 옴마니 반메훔을 비롯 불교 노래 20곡, 또 이번에 나오는 ‘삼팔광땡’, ‘독도는 우리 땅’의 작곡가 박문영이 만들어준 마치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My Way’에 근접하는 ‘후회하네’ 등등.

아! 숨찬다. 요즘 열풍이 불어닥쳐 트로트의 남녀 대왕들한테서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참 신비스럽다. 그토록 밤낮으로 TV에 등장하는 데도 이렇다 할 히트곡이 단 한 곡도 안 나왔다는 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다. 물론 곧 나오겠지만 말이다) 히트곡과 신곡들을 줄줄이 내놨다. 이 어찌 삼팔광땡이 아닌가.

앞으로 이 연재를 쓸 날이 두 번밖에 안 남았다. 막 나가보자. 그럼 나는 내 인생 가수로만 삼팔광땡이었던가.

아니다. No다. 그림도 있다. 미리 말하지만 오늘 아침 신문에서 후배 가수 솔비(이름이 멋지다. 화투에 나오는 이름 같다. 나도 대학생 때 알바로 번안 작사가 대접을 받을 때 음악대학생으로 그런 알바 짓을 한다는 게 창피해 이름을 고철(高哲)로 고쳐 쓴 적이 있다. 가위질 소리를 내며 냄비나 고철 사요 할 때의 그 고철을 그대로 쓴 건데 난 계속 안 쓴 게 후회가 막심하다)가 국제적 미술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뉴스를 들었다.

정선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아”

나는 어떤가. 국제적 상은커녕 동네에서 주는 상도 못 받았지만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미술 대작 사건으로 무려 5년간이나 재판을 받게 되었다. 상을 받은 거나 재판을 받은 거나 받는 건 마찬가지다. 썰렁썰렁. 조용히 가수로서 노래를 신나게 부르다가 노래가 밥벌이로 변하면서 나는 노래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래선 안 된다 하며 취미생활로 취한 게 미술이었는데 웬걸, 이것이 어느덧 상품으로 변하고 이곳저곳에서 바쁘게 전시를 하다 보니 그런 재판까지 받게 된 거다. 결국 국가가 세금을 들여 5년간 그냥 보통 가수로 이름난 나를 대(大)화가로 등극시켜준 형국이 되었다. 5년간 이상한 유배생활을 하며 나는 그림에 열중할 수 있었는데 재판이 무죄로 끝나고 다시 전시를 할 경우 사람들이 구경와서 “에계 이렇게 시시한 그림을 그리는데 재판을 5년씩이나 했단 말야?” 할까 봐 오히려 열심히 그렸다.

최근에 피카소나 브라크의 입체파 그림에 화투를 섞는 pop 미술을 시도하다가 끝내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포옹’에 화투를 섞으면서 “와! 이제 그림도 성공했다”, 나 혼자 외쳤다. 음악은 복잡한 룰이 개입하지만 미술은 다르다. 미술은 100프로 자유다. 막판이라 중앙SUNDAY 독자님들도 충분히 양해해주리라 믿는다.

그럼 조영남의 문학(엇쭈!)은 어땠는가. 문학도 대박이다. 우선 중앙SUNDAY를 연재하면서 나는 어마어마한 칭찬을 들었다. 무안할 정도의 칭찬을 받았다. 물론 책도 많이 썼다. 2000년 『예수의 샅바를 잡다』부터 지난해 『시인 李箱과 5명의 아해들』까지 줄잡아 10권이 넘는다. 이만하면 문학도 삼팔광땡 아닌가.

오늘 저녁밥을 먹는데 내가 좋아하는 친구 정선희가 TV에 나와 얼른 전화를 걸었다. 잘 있냐. 잘 있다. 수다를 떨다가 정선희가 말했다. “오라버니처럼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산 사람은 없어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오라버니가 뭘 기원하면 그건 죄가 될 거야” 했다. 나는 정선희를 위해 삼팔광땡 같은 인연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려고 했는데 죄가 될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빌어먹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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