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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그룹 혁신 ‘속도전’…X세대 이하 임원 47%로 급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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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호 14면

3040 젊은 임원 바람 

“세대교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9일 삼성전자가 단행한 임원 인사 결과를 접한 재계 반응이다. 앞선 7일 삼성전자는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면서 사내 3개 부문 대표를 전원 교체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틀 만의 임원 인사 역시 파격이었다. 40대 부사장이 8명 나왔다. 최연소인 김찬우(45) 부사장은 구글 출신의 음성처리 전문가로 그동안 주요 디바이스의 음성인식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 성공한 점을 평가받았다. 30대 상무도 4명이 나오면서 역대 최다 타이를 기록했다(지난해는 1명). 최연소인 박성범(37) 상무는 모바일 프로세서 설계 전문가로 그간의 기여도를 인정받았다.

이 같은 파격 인사는 삼성전자가 지난달 29일 ‘미래지향 인사제도’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바 있다. 여기엔 연공서열을 타파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인재를 중용해 젊은 경영진을 조기 육성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부사장과 전무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합하는 등 임원 진급 단계를 줄이는 한편, 직급별 표준 체류 기간을 폐지했다. 능력에 따라 30대 임원이나 40대 최고경영자(CEO)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도록 인사제도를 개편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삼성전자만의 얘기가 아니다. 과거였다면 관행상 대부분 늦은 나이에야 가능했을 ‘기업의 꽃’ 임원 승진 시기가 이르면 30대로 대폭 앞당겨지고 있다. LG그룹의 경우 지난달 25일 임원으로 승진한 132명 가운데 62%인 82명이 40대였다. 최연소인 신정은(41) LG전자 상무는 5G(5세대 이동통신) 기반의 텔레매틱스(차량용 무선 인터넷 서비스) 선행 개발로 신규 수주에 기여한 성과를 평가받았다. 카카오의 자회사 카카오브레인은 올 4월부터 1988년생의 인공지능 딥러닝 알고리즘 연구팀장 출신 김일두(33) CEO가 이끌고 있다.

이런 추세는 이미 통계로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 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국내 30대 그룹의 올 3분기 기준 X세대(1969~78년 출생자) 이하 임원 비율은 46.8%로, 2년 전(27.3%)보다 급등했다. 그룹별로 보면 ▶삼성(55.5%) ▶현대자동차(32.0%) ▶SK(53.6%) ▶LG(50.7%) ▶롯데(61.3%) 등 5대 그룹은 물론, 신세계(54.4%)와 CJ(67.4%) 등도 젊은 임원 비율이 상당히 높다. 네이버(94.2%)와 카카오(92.9%) 같은 포털 기업은 아예 절대적인 비율을 보인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 같은 변화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재용(53)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51)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43) LG 회장 등 재계 분위기를 선도하는 주요 그룹 총수들이 40·50대로 수년 전 부친들에 비해 대폭 젊어졌다. 이들은 업종을 막론하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처럼 실리를 중시, 연공서열보다는 성과주의에 입각한 인사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포스트 코로나 시대까지의 ‘대(大)전환기’에 사업 다각화 등 변신에 있어 속도전이 한층 중요해진 것과도 관련이 깊다.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 문화와 인사 적체 등으로 의사결정이 느리면 생존 경쟁에서 한순간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것이다.

더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사내의 MZ세대(20~30대 Z세대 및 밀레니얼 세대)와 중·장년층이 잘 소통하면서 조직력을 갖추는 일의 중요성이 커져서다. 기업마다 연공서열을 중시하고 상명하복의 수직적 소통에 익숙한 이전 세대와는 성향이 확연히 다른 MZ세대 구성원 비율이 최근 급등하고 있다. 이들이 납득하고 따를 만한 조직 문화를 갖춰야 결집력이 강해져 업무 효율도 높아진다고 기업들은 보고 있다. 그래서 중·장년층과 MZ세대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다양한 사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부서별로 MZ세대가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 등을 사업부장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MZ보드’라는 소통 창구를 운영 중이다. LG유플러스도 20대 신입사원들이 CEO와 중·장년층 선배들에게 트렌드를 알려주는 ‘리버스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런 소통 노력이 임원 인사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2일 인사를 단행한 SK하이닉스에서는 사상 첫 40대 사장과 30대 부사장이 탄생했다. 56세의 곽노정 사장과 함께 승진한 노종원(46) 사장, 직급상 부사장이 된 이재서(39) 전략기획 담당이다.

SK하이닉스는 사장 이하 모든 임원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일하고 있지만 이를 고려해도 파격 인사다. 노 사장은 부사장이던 지난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합병(M&A) 등을 주도하면서 판단력과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이와 함께 향후 회사의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젊은 리더라는 이유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담당 역시 회사 측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MZ세대 우수 리더’로서 발탁됐다. 둘 다 업무 성과와 함께 MZ세대와의 소통 능력을 평가받은 것이다.

이정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매사 공정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성향을 지닌 MZ세대는 회사에서도 상급자를 단지 연장자라는 이유로 따르진 않는다”며 “기업들이 내부 소통 문화를 재정비하면서 실력이 뒷받침되는 젊은 연배 구성원을 핵심 리더로 세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네이버가 지난달 17일 차기 CEO로 MZ세대에 해당하는 1981년생 최수연(40) 글로벌사업지원부 책임리더를 내정한 것도 비슷한 이유로 해석된다. 그는 2019년부터 네이버 글로벌사업지원부에서 해외 사업 전반을 진두지휘하면서 문제 해결력과 시장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네이버는 올해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직원의 극단적 선택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국정감사에서 이해진 창업자가 이 문제로 질타를 받고는 “젊고 새로운 리더들이 나타나서 회사를 이끌어 경영 쇄신을 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업종 특성상 MZ세대 직원 비율이 가뜩이나 높은 회사인데, 정작 이들의 목소리는 잘 반영되지 않아 조직 문화 개선이 선결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능하면서도 젊은 새로운 CEO가 조직의 상처를 잘 봉합해줄 것으로 기대한 셈이다.

재계 안팎에선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업들의 젊은 리더 선호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한 신중론도 없지 않다. 단순히 리더를 젊은 사람으로 바꾼다고 해서 꼭 조직의 성공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카오는 2015년 당시 35세의 임지훈씨를 CEO로 선임해 화제를 모았다. 회사 측은 케이큐브벤처스(현 카카오벤처스) 대표를 맡았던 젊고 유능한 그가 젊은 구성원들과 잘 융화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조직의 강점을 극대화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카카오는 온·오프라인 연계(O2O) 신사업에서 기대만큼 성과를 보지 못하는 등 경영 실적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2016년엔 직원들과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그는 김범수 창업자의 결단으로 2018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가하면 젊은 임원이 도덕성 논란을 낳은 사례도 있었다. 2019년 34세에 LG생활건강 상무가 된 심모 씨는 직원들에게 수시로 막말을 했다는 의혹 속에 올해 대기발령 조치 대상이 됐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는 “젊은 리더는 조직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나 기술 혁신에서 강점을 보일 수 있다”면서도 “경험 부족은 자칫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 젊은 리더의 과도한 부각이 고용 불안을 키운다는 중·장년층 시각도 없지 않다. 한 기업의 50대 부장은 “젊은 임원이 오면 연장자는 나가라는 회사 측의 노골적인 신호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며 “연공서열 타파라는 취지엔 동의하지만 정년 보장 등으로 회사가 직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도 힘써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기업들 고강도 구조조정 탓 임원 승진 갈수록 ‘좁은 문’

30·40대 임원의 발탁은 잦아지고 있지만, 승진 문턱 자체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헤드헌팅 전문업체인 유니코써치에 따르면 기업들의 임원 승진 확률은 10년 전인 2011년 0.95%에서 올해 0.76%로 되레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 기준 국내 100대 기업의 임원(이사회 활동을 안 하는 미등기 임원) 1명당 직원 수로 산출한 결과다. 이에 따르면 2011년엔 임원 1명당 직원 수는 105.2명이었다. 올해는 130명 가까이로 늘었다(연말 인사 이전 기준).

업종별로는 ▶유통(320.5명) ▶조선·중공업(209명) ▶철강(202명) ▶항공·해운(199명) ▶건설(173.9명) ▶자동차(146.7명) ▶전기·전자(134.6명) 등의 순으로 임원이 될 확률이 낮았다. 한국경제연구원도 올 상반기 50대 기업의 전체 직원 수 대비 임원 비율이 1.3%로, 2011년(1.5%)보다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1000명 중 13명만 임원이 된다는 얘기다. 임원 비율이 1% 미만인 기업도 27곳(54%)으로 10년 전 22곳(44%)에 비해 늘었다.

이는 최근 기업들이 경영 효율성 강화를 중시하면서 고강도 구조조정으로 사내 부서 수 자체를 줄이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경우 임원급 부서장도 같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또 현대중공업그룹과 한화그룹이 임원으로 분류하던 상무보 직급을 폐지하고 상무로 통합하는 등, 임원 직급 수를 줄이는 사례까지 늘어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비용 절감과 경영 효율화를 위해 내부 임원 수는 줄이고 외부 협업 등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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